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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탈북자의 수기 북한의 종교 탄압 (퍼온글)

북한의 종교인 탄압





한국 귀순후 느낀것인데 종교계에서 북한의 지하교인이 몇 명이고 얼마를 선교시켜서 북으로 파견햇느니.몇명의 지하교인이 생겻느니.그교인들을 언제부터 어덯게 처형시키고 어쩌고, 저쩌고 복잡하다.

얼마 전에 미국의 풀러 신학대학원 이반석 목사의 논문을 잠간 보았다.

내가 몰랐던 북한의 지하교회 실태에 대하여 놀란 부문도 많았다.

물론 100% 마음에 와 닿은 논문은 아니다.

아쉬운 부문도 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식의 비난도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종교인들이 흔히 북한에 대하여 말할 때면 김일성도 기독교인이였고, 김일성의 집안도 기독교인이였다고 한다. 마치나 그 시절에 그 사람들과 함께 목회를 한 듯이 말이다.

또한 김일성이 죽은 후 그의 유물에서 성경책이 나왔다고 마치나 저들이 본 듯이 말한다.

한국의 그많은 종교인들중에. 그리고 한국의 수많은 탈북자 중에 김일성이 죽은 후 사물함에 든 성경책을 직접 확인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세상이 참 더럽고 치사한게 종아리보고 뭘 봤다고 해대는 것이다.

말이 아무리 굴러가며 보태진다 하나 도를 넘겨도 너무 넘겨서 말조의 세상인 듯 싶다.

가상적으로 예측하여서는 마치나 그것이 사실인 듯이 부풀려지고 또 부풀려서 그렇더라.

입 가진 사람이면 전부가 6.25 참전자인 듯싶고, 입 가진 사람이면 전부다 김일성의 전우이고, 같이 교회 다닌 듯이 생동하게 엮어 댄다.

제발들 좀 그러지들 말았으면 싶다.

특히는 한국에 와서 말이 많은 북한인들!

본것은 본것대로만 들은 것은 들은 것대로만, 못 본 것은 못 본 것대로... 좀 처신들 바로 했으면 좋겠다.

궁금한게 있다. 지하교인에 대하여 이렇고 저렇고하는 사람들 중에, 실제로 북한의 지하종교인을 상대해본 사람 있나?

그런 종교인을 국가의 지시로 처형해본 사람있나? 아니 처형하는 것을 먼발치에서나마 본 사람조차 있나?

그 어떤 반박이나 또 어떤 감정으로 그네들의 주장을 콩이야, 팥이야 하자는 게 아니다.

이글이래도 남기려고 하는것은 하도 지하교회 어쩌고 말들이 많고, 오늘날까지도 사실이냐 어쩌냐 떠들어대고 참 사람들이 한심해도 너무 한심하고 북한에 대하여 전문가들 모양을 떠는 사람들까지도 그 모양새인가 싶어 쓰려는 것뿐이다.

내가 이런 소리 하면 또 헛소리들이 많겠지? 특히나 북한인들은. 그 입들이 더럽고 무섭다.

받아들일 사람은 받아들이고 말 사람은 말라지.

아쉬운 점이라면 처형된 교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이유로 누가 처형되였는 가를 그 어느 누구도 정확히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긴 논문을 쓴 목사분도 북한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적 확인 부문에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조금만 북한의 사실 확인을 위한 것에 깊이 접근한다면 확실한 자료들을 얻었을 것이였을텐데 그게 좀 아쉽다.

물론 나처럼 귀순후에도 목을 내대고 북한으로 드나드는 무리를 범하지 않는 이상에야 쉽지 않을 것이지만 방법은 무한정 아니겠나?

정말로 종교 탄압에 대한 확실한 자료를 얻으려 한다면... 이것에 대해서는 그만 두자.

목사가 용병이 아니고 전투인이 아니고 테러리스트가 아니고,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닌데 당연한거 아니겠나.

지금 지하교인 실체에 대해서는 한국이나 종교계에선 벌써 96년부터 알려졌다고들 한다.

그런데도 아직도 심지어 존재여부, 사실여부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말들만 늘여 놓고 있다.

물론 체포된 여러 교인들은 어떻게, 어느 시기에 처형되였는지 알려진 것도 없다.

나 하나가 북한 전역에서 처형되고 감옥에 끌려가고 등 탄압을 받은 그 사람들에 대하여 전부 확인한 것도 아니다.

또 무당과 같은 미신 때문에 죽어가고 감옥에 간 사람들까지 지하교인으로 둔갑시킨 종교계의 대변론자 들에게 일일이 이해를 시키자는 것도 아니다.

북한의 종교 실태에 대하여 구구 절절히 설명하자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쓰려는 건 몇 사람뿐이다.

나는 무신론자다.

종교를 믿으면 미친 사람으로, 나라의 정치에 역행하는 민족 반역자로 낙인하여 탄압했던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 그 종교인들과 한 하늘 아래에 살고 있다.

지금에 와서야 ,이제 자본주의 사회를 10여년 살고 나서야 믿는 사람들이나 나나 별다른 데는 없는 똑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껴 간다.

특히나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일찌기 종교인들을 보아 왔고, 그들의 종교 행위에 대한 국가의 탄압에 동조해온 한 사람으로써 종교나 이념을 떠나서 개개인 인간으로써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가 오늘 여기서 북한의 종교인 탄압에 대하여, 세상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또한 종교를 한다는 사람들. 더욱 특히는 북한 선교를 한다는 사람들 조차도 잘모르는 내가 보고 겪은 몇 가지에 대하여 밝힘으로써 인간의 탈을 쓰고 행하여진 북한의 종교인 탄압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나 같은 한 사람이 어찌 그 전부를 다 안다고 하겠는가?

북에 있을 때에는 그나마 김일성 사상, 주체사상이라는 것에 충실하여 10대의 어린나이에 북한 노동당에 화선입당을 한 열성당원이었다.

내가 이제는 해외에서 종교도 접하여 보니 북한의 주체사상도 어떤 종교적 신앙 비슷한 것으로 느껴지면서 그런 것에 내 정신과 청춘을 다 빼앗겨 온 것이 지금은 분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솔직히 중국에 처음 왔을 때에도 종교를 믿는 사람은 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 미친 사람들이거나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허무하고 불쌍한 사람들,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이라고만 여겨 왔다.

종교를 믿으며 떠받드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관념이라면 목사나 신부, 스님들은 전부 말재주가 좋아서 무식한 사람들을 종교에 미치게 하여 등쳐먹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여 왔다.

많은 나이를 살아 온건 아니지만 북한에 살면서도 어떠한 관계로 여러 종교를 목격하여 왔다.

또 여러 나라들에서 기독교, 천주교, 불교, 통일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종교인들을 보아 오면서 통상 내 고집적 견해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 나간 인간들이라고 느껴왔다.

어린 시절에 한창 정신력무장 즉 그네들이 말하는 빨갱이 정신으로 길들여져 가던 시기에, 내 인생을 배고픔을 넘기기 위한 것에 목숨 걸던 철모르던 시절 내손에서, 그리고 나의 동료들의 손에서 자신들이 소위 천국이요, 천당이요 하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았지만 결국에는 한을 품고 떠나간 여러 종교인들에 대하여 그들도 인간이요, 나도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이 인간에게 지은 죄에 대하여 늦게나마 사죄하는 마음에서 이름 석자도 남기지도 못하고 떠나간 그들의 명복을 빌면서 구천에서 떠도는 그들의 억울하고 불상한 영혼들을 위하여 삼가 명복을 빌면서 몇 자 적으려 한다.

또한 그 체제하에서. 그 상황 속에서, 나의 처지에서는 나 자체가 최대한의 충실성을 인정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었기에 나의 본의가 아니었음도 알아 주셨음 하는 바램이다.

그냥 당시의 내가 겪은 상황에 대하여 그대로 밝히려는 것뿐인데 눈앞에 영화처럼 흘러가는 이것을 감히 내 글재주로 글을 남기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걸 안타깝게 느낄 뿐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처형된 교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이유로 누가 처형 되였는지를 한국의 그렇게 잘난 종교계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하교인 처형설만 말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국에 간 수많은 탈북자 중 극소수가 종교 탄압에 대한 실상을 몇 가지 증언할 뿐이다.

지금 북한의 지하교인 실체에 대해서는 한국이나 종교계에선 이미 오래전에 알려졌다고 한다.

나 하나가 북한 전역에서 처형되고 감옥에 끌려가고 등 그 참혹한 종교 탄압에 대하여 전부 알 수는 없다.

물방울들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강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는 자연의 법칙처럼 나 하나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 둘 그 실체들을 밝혀냄으로써 저 독재정권이 무너지기를, 하루 빨리 무너져 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겪은 당시의 사연 몇 가지를 적으려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종교인에 대하여, 아니 처음으로 북한 정부에서 노동당을 음해하는 반당, 반혁명분자로서,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파견된 간첩의 자식들을 마주한 것은 1987년이다.

당시 평남 00항 당 책임비서로 있던 자가 북파 잠복간첩으로 잠복 활동하다가 80년대 중반 한국의 지령으로 활동을 하다가 북한 보위기관에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나 자체가 사건 관련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른다.

단지 그 사람의 집에서 성경책, 찬송가책, 그리고 십자가로 만들어진 목걸이식 악세사리 수십개가 나왔다는 것을 상급기관 군관(장교)들에게서 들었을 뿐이다.

그 시기 나 자체가 군관이 아닌 일개 하사관에 불과했고, 그 간첩이라는 사람의 두 아들 체포 작전에 직접 동원되어 그들을 잡아다 정치범 관리소에 넘겨주었을 뿐이다.

함남 연풍에 지어진 김정일 수중 특각(수중호화별장) 000초대소에서 군관으로 근무하던 맏아들을 보위사령부 2명의 군관과 군단 보위소대 하사관 3명(본인까지)과 그 외 다른 군관 3명이 연풍특각에서 맏아들을 인계받아 지금은 없어진 관모 정치범관리소에 넘기였다.

(현재는 관모정치범 관리소와 온성군 종성구 동포리 정치범 관리소를 화성군 16호 정치범 관리소로 합치였다. 그리고 당시 그 지역을 인민군 담배농장과 백도라지농장으로 건설하였다.)

다음으로 둘째아들이 포병군관학교에서 근무하였는데 순천에 도착하여 학교에서 둘째 아들을 데리고 오면서 부친이 급 사망하였다는 급보를 전하고 장례에 가는 것처럼 속여서 출발하여 경성까지는 열차로, 나머지는 지프에 태워 몇 대 때려 기절시킨 후 자갈을 물리고 수갑을 채워 관리소에 도착한 후 인계하였다.

지금도 인계 당시의 상황이 잊혀지지 않는다.

관리소 정문에는 지금의 인민 보안성(그때는 사회 안전국) 대원들이 AK자동보총을 들고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지금도 정치범 관리소는 당시 국가 안전부 소속 현역 경비군인들과 보안성 소속 현역 경비대원들이 통상경비를 맡는다.

정문 오른쪽으로 30m밖에 초대소가 있다.

현역 군인인 우리도 관리소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다.

우리가 도착하니 인민군 군복이지만 군모도, 견장도 없는 인원 4명이 정문에서 여러 서류를 넘겨받고 우리가 채워서 갔던 수갑을 풀어 돌려주고, 체포자가 입었던 군복, 군관 혁띠, 군모, 견장들을 카메라로 찍은 후 우리에게 돌려주고는 팬티만 입힌 채로 수갑을 채워 맨발로 데리고 관리소 안으로 사라졌다.

그 아들이 왜 죄 없는 자기를 잡아 오느냐 울부짖자 4명의 보위원이 아무소리 없이 다가와 달려들어서 그를 구타하니 단방에 입으로 피 흘리며 꺽꺽거리면서 찍소리도 못하고, 딩굴고, 쓰러진 그를 팔 하나씩 붙잡고 개처럼 질질 끌고 들어가는데 바라보는 우리 마음이 섬뜩하였다.

저놈은 제 애비가 간첩인줄도 모르고 억울하게 잡혀 가는구나 싶었지만 당시는 불쌍하다는 마음보다는 살벌한 그 현장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군단 사령부에서 배정받은 지프를 처음에는 내가 운전하다가 심장이 와들와들 떨려 산골길을 00읍까지 90리 정도를 내려 와야 하는데 도저히 운전할 자신이 없어 다른 친구에게 운전대를 넘겨주었다.

종교와 관련하여 처형된 사람을 내가 또다시 목격하게 된 것은 군관학교에 가기전이였는데 그때가 1986년으로 기억된다.

부대와 이름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00사단 직속 측지소대 부소대장 상사 김00, 함북 청진 사구지구에 위치한 군단 포 사격장에서 공개처형하였는데 당시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그가 소대의 군인들에게 지급된 군복과 식량 등을 민가에 빼돌려 현금을 만들어 숨겼다는 것과 사회의 처녀를 사귀여 부화방탕한 사생활을 함으로서 군사 규율을 위반하였다는 죄명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여 보아도 그리고 그 시기까지 인민군적으로 흘러온 역사를 보아도 그만한 죄라면 생활제대나 출당이 보편적 처벌인데 이정도 처벌만 받아도 그 사람의 정치적 운명은 영원히 매장되는 것이고 후대에까지 그 치욕을 남기는 엄청난 처벌인데 그렇게 공개처형까지의 엄중함이 아닌데 중앙당 시범에 걸렸다는 것이다.

공개처형식이 끝난 후 우리 소대에게 시신 수습명령이 내려져 가마니에 시체를 넣기 전에 단검으로 입은 군복을 주욱 찢어내고, 신발을 벗기고 알몸만 가마니에 넣은 다음, 군단 운수차에 실어서 한참 달리다가 외진 광산 버럭 더미를 헤치고 시체를 놓고 거기에 디젤유를 뿌리고 불 태워 버럭더미에 묻어 버렸다.

당시 외가켠 친척이 군단 보위부에 있어서 부대로 귀대하던 도중 친척집에 잠간 들리어서 물어 보았다.

이번 시범 처형이 어떤 내용이기에 총살까지 하느냐 했더니 그런게 아니고 그 사람의 부모들이 남조선 놈들의 지시를 받고 하나님 전파인지 뭔지를 했다는 것이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넌 임마, ‘성황당’ 연극도 못 봤냐? 거기서 나오는 전도사 그런거 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황당’이라는 연극에는 전도부인, 스님, 무당이 출연하여 저저마다 저들의 종교를 믿으라고 행하는 것들을 풍자하여 비판하는 연극으로서 김일성이 빨치산 시절에 직접 만든 연극이라 한다.

<아~ 그거 하나님 어쩌고, 원수가 오른뺨 때리면 왼뺨 어쩌고, 미친 여자 안경 끼고 책을 흔들어 대던거요?> 했더니 < 응 그래 그런데 문제는 오늘 총살한 그놈도 어려서부터 부모들이 그 짓 하는 거 계속 보아 왔다는 게 발각되었다, 그러니 그 놈도 며칠 있으면 제대인데 부모들처럼 사회 나가면 그 미친 짓거리 할 것 아니냐, 보위부에서 조사해보니 그 놈이 군대 복무 10년 중 하나님소리 자주 했다는 게 확인됐다.>라고 말하엿다.

아, 그래서였구나.

당시에는 나 역시도 그 새끼, 미친 새끼 죽을 짓 했구나 생각하였다.

지금도 종교를 잘 이해 못하는데 그때가 10대의 소년기였으니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그 다음으로 내가 종교인과 마주친 것은 1987년 하기 훈련 때였다.

당시 내 군적을 군단 보위소대 검열원으로 두고 전문훈련을 시작하였는데 군단 체육대원으로 때로는 인민무력부 종합 특수 훈련 보장으로 특수 체육경기대회에 자주 참가할 시기였다.

그 시기 북한군 내부가 한창 요란히 술렁일때인데 그 이유는 <차병준 사건>과 <오극렬 사건>으로 군대의 비정치화조치가 어쩌고 하던 시기라 시글벅쩍 하였다.

2년에 한번, 3년에 한번 꼴로 대대적인 무력부 특수체육경기대회와 쌍방 교방 훈련, 반 특공대 훈련이 벌어진다.

최광이 인민군 총참모장에 임명되면서 특수부대뿐만 아니라 각 군 부대들의 특기병들도 참가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최광은 한때 김창봉과 함께 124군부대와 그와 비슷한 특수부대를 만든 멤버인데 김창봉 숙청시 함께 숙청 되여 오랜 기간 고생하다가 다시 김일성의 신임으로 총참모장에 오른 사람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해 황해도 신계에서 벌어진 인민군 3종경기 대회와 특수체육경기 대회에 참가했다가 곧바로 반 <특공대> 훈련에 참가하였다.

반 <특공대> 훈련을 위하여 함흥 00군에 위치한 000훈련소에서 장비를 갖추고 헬기를 타고 몇 시간 후 낙하한 곳이 관모봉이었다.

한국의 특수부대에서 근무한 사람들은 북한의 이 관모봉이 군사전략적으로 어떤 중요한 위치인지를 잘 알 것이다.

또한 북한군에는 한국군의 낙하지점으로 방위 목표가 설정되어 있는 곳이다.

관모봉을 중심으로 양강도 백두산 방향, 함남 고원 산맥, 백암령, 함북 경성, 무수단, 청진등으로 뻗어 나가는 군사 요충지이다.

온포 특각(김일성별장) 동쪽에서 00km정도 관모봉 방향으로 행군하다가 다시 화대 방향으로 00km정도 직행하면 거기에 대형 지하 캠프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어떤 군사기지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고, 그 지역을 일부 아는 사람들에게서 들은 소리가 무수단 핵 미사일 기지까지의 지하 군사기지 연결 통로라는 것만 알게 되었는데, 훗날 6군단이 해산되고 9군단이 새롭게 창설되면서 9군단 사령부를 그 방향에 두면서 지하 핵 기지 건설이 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함북, 함남, 자강도, 양강도 안에 구축된 수많은 군사기지들과 군수기지들의 현황은 제 아무리 최첨단 위성 장비나 정찰 장비라 해도 그것들을 발견해내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당시 내가 속한 인원들에 내려진 명령은 관모봉에 낙하하여 관모봉 밑에 있던 옛 인민무력부장 별장에서 탄약과 장비를 넘겨받고 00km 떨어진 정치범 관리소 외곽으로 행군하여 골짜기를 따라 길주읍내로 내려오던 중 00공군기지 습격 후 신속한 철수로(대포동미사일이 쏘아진 곳) 무수단리에서 해상에 대기 중인 동해 함대 사령부 소속 00전대 공기 방석 편대의 000함선으로 나진 지구까지 해상 철수하는 것이 임무였다.

길주군 000전투헬기 연대는 유사시 미사일 탑재, 무수단리 초도섬 방향, 해상 전투가 주목표이며, 미군이나 한국군과의 전투가 아닌 일본 해상 자위대와의 전투 및 방어가 기본 임무이다.

우리의 임무는 이 기지를 습격하여 비행장 폭파 후 3대의 헬기에 나누어 앞에서 말한 온포 특각 00km내의 지하 캠프에 착륙하여 거기서 철수 명령으로 무수단 해상에서 00전대와 함께 나진 지구로 철수하며, 2차 명령은 00전대가 위치한 나진 일대 방진이란 곳의 대초도 섬에서 새 임무를 받게끔 되어 있었다.

경성군 00해안선 출동 및 미사일 기동타격을 수행하는 것이 2차 임무로 내려질 예정이 있었다.

우리는 관모봉에서 출발하였다.

관모봉 밑에서 정치범 관리소 외곽 코스를 따라 평륙까지 행군하려면 9시간 걸리는데 외곽이 아닌 정치범 관리소를 직선으로 질러 버리면 4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북한군에서 흔히 말하는 ‘요꼬돌이’를(한국에서의 새치기와 의미가 같다.) 하였는데 보통 북한군 특수부대들의 행군은 백리부터 천리 행군까지 대부분 군용좌표가 설정되어 있다.

이때도 우리는 요꼬돌이를 하면서 정치범 관리소 일부 구역을 꿰지르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정치범 관리소가 어떤 곳인지 목격하게 되었다.

관리소는 1구역, 2구역, 3구역으로 나뉘는데 정치범 관리소의 자유 구역이라 말할 수 있는 1구역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낙하산 배낭을 둘러메고 한국군 군복을 입은 군인 20여명이 그런 곳을 통과하니 그 관리소는 벌둥지 쑤셔 놓은 듯 들끓었다.

그 안의 죄수들이나 관리 인원들이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바로 우리가 놀란 것이 있었으니 그것만 이야기 하려고 한다.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죄수들이 어떤 토굴에서 어떻게 일하며, 어떻게 생활하며, 완전 무장한 경비병들이 어떻게 지키며, 그 내부가 어떻게 철통같은 요새로 꾸려져 있었는가를 말하자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그곳을 통과하던 시각에 그 정치범 관리소 야외 공터에서는 관리소 여직원의 장례식과 함께 죄인들에 대한 처형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바로 관리소장의 딸이 관리소 교환대 소대장으로 중위계급으로 근무하였는데 이 여자가 죄수들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여자 죄수 여러명이 이 여소대장이 야간근무를 서는 날에 화장실 부근에 숨어 있다가 이 여자를 납치하여 죽이고 몸 전체를 토막내여 교환대 앞 돌배나무에 토막낸 신체조각들을 걸어 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창자까지도 빨래 널듯이 걸어놓고 여자의 머리와 젖가슴은 도려내여 소장의 사무실 마당에 던져 넣은 그 어디에서도 생각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는 그런 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얼마나 죄수들에게 못되게 굴었으면 그런 처참한 죽음을 당했는지 모르겠으나 한켠에서는 군인 장례식을 치르는 참이였고, 다른켠에서는 죄수들 중 전기 철조망을 넘다가 죽은 3명, 자살한 5명과 나머지 전원을 체포하여 상급기관의 지시로 관리소 내에서 공개처형을 하였는데, 바로 그들에 대한 화형식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남한에서 투하된 특수부대인줄 알고 무장 충돌까지 벌어질 번 하면서 대 난리가 일어났으나 우리의 실체를 알고는 경비대대의 군관들한테서 이러한 사건내용의 설명을 듣게 되었다.

듣고 보니 기가 막히었다.

빨리 빠져 나가라는 관리소측의 요구를 무시하고 아무래도 지름길로 인한 4시간 공백을 어떻게 메꿀것인가를 잔머리 굴리던 고참들이 우리 같은 쫄다구들에게 화형식을 보여 주어 우리의 심장을 든든하게 하여야겠다고 하면서 관리소측 간부들과 토의하고 결국 승인되어 한 시간 가량정도 생각지도 않던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사실 빨리 그 지역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괜히 투정을 부렸다간 큰일 나는 쫄다구 신참 시절이었으므로 울며겨자 먹기로 그 자리에서 당시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다들 알겠지만 북한의 특수부대 특권은 한국의 국회의원이라 할 수 있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

또한 국가 내에서 행하여지는 특수부대원들의 그 어떤 비리도 묵과되는 데가 북한이다.

1구역내 사람들만 모이였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때 본 것은 2천명도 더 넘게 보이는 죄수들의 인원이었다.

3구역까지 합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는 곳이겠는가 생각하니 끔찍하였다.

1구역은 집체로 감자 농사를 지어 감자 전분을 생산하는 것이 위주이고, 건설과 축산업을 하는 경범죄자들이였다.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는 화형식이 거의 끝나가던 때였다.

사람들의 몸이 불에 기름처럼 잘 타는 걸 그때 처음 보았다.

사람이 그냥 불더미속에서 탄 것과 기름을 뿌려 태웠을 때의 냄새가 다르다.

그 고약한 냄새를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자살한 사람들과 철조망 전기에 걸려 죽은 사람들까지 작은 기중기차로 발목을 걸어서 불더미에 처넣은 것을 보니 짐승을 불에 태우는 것과 흡사하였다.

사람을 그렇게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닌 무려 15명을 태우는 것을 바라보는 당시 우리의 마음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딱히 모르겠다.

그것도 여자들을...

내가 이 사연을 적는 이유가 화형식때 갱생 68형 지프차에 확성기 두 대를 설치하여 이들의 범죄를 낱낱이 까밝히면서 폭로하는데 그 내용에는 이들이 관리소 내에서 비밀리에 조직을 만든 종교무리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관리소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54세의 여자, 61세의 여자, 40세의 여자들이 관리소에 끌려온 지 3-4년 정도 되는 사람들인데 사회에서 종교범죄와 무당을 하다가 잡혀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며 종교 범죄자들의 가족 및 친척들이라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였고, 그 어떤 것이든 내 자신이 오직 당의 노선과 정책만이 생명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어서 그들의 처형에 대한 나의 마음은 참, 미친놈들 미친 짓 하였구나 이런 생각뿐이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는 중국으로 탈북한 사람들까지도 민족 반역자로 처형되던 시기였고, 그 중에서도 탈북하여 러시아나 중국에서 돈이나 벌다가 잡히면 몰라도 현지에서 한국 목사들을 만나서 하나님을 믿다가 만약 잡혀서 북송되면 민족 반역자로, 반혁명 분자로 오명을 쓰고 엄벌에 처해져 처형되었다.

북한 땅에 들어가 종교를 전파하다가 잡혀서 매맞아 죽고, 총에 맞아 죽고, 목매달려 죽고, 실험용으로 죽고, 묻혀 죽은 수많은 영혼들을 어찌 말로나 글로 다 적을 수 있으랴.

북한 사회에서 군중을 모아 놓고 민족 반역자로 낙인되여 교수형에 처하거나 총살형을 받으면 그나마 행복한 사람들이다.

죽어도 불쌍하게 죽는 인간의 최고의 고통을 당하며 죽는 부류가 대다수이다.

90년대를 맞으면서 북한의 식량난이 어려워졌다.

사실 그보다 썩 전부터다.

우리 부대는 일반 부대와는 달리 공급도 특급이다 보니 백성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80년대 중반부터 3국을 통하여 들어온 한국 쌀과 한국군복과 한국 씨레이션과 한국육류를 먹으면서 군복무를 했으니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여기서 말하자는 중심은 80년대 말부터는 특수부대들과 생화학무기관련 부대들에 훈련용으로 죄수들이 배정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밝히자는 것이다.

우리는 그 죄수들을 보통 <돼지>라고 불렀다.

1년에 생화학 무기 실험을 3차례 정도 실물 교육하는데 독가스 실험물이나 독해물에 의한 실험용으로 그로 인해 그들이 당하는 몸부림은 자주 보아 왔지만 훈련용으로 <돼지>들을 받아서 때려죽이고, 찢어 죽이고, 찔러 죽이고, 탕쳐 죽이고, 등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각종 내용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기조차 괴롭다.

제아무리 개나 돼지를 파리 잡듯이 때려죽이는 소위 용감한 군인도 첫 시작은 너나없이 환각제를 먹지 않고는 그런 훈련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다.

군용컵으로 한 컵씩 환각제를 탄 물을 먹이는데 보통 2시간의 환각이 일어나는데 사람의 정신이 두려움과 공포에 하도 못이 박히다보면 대부분 10분이나 15분이면 정상으로 돌아와서는 와들와들 떨군 하였다.

그러면 훈련 교관들이 물푸레나무나 박달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훈련병들을 때리며 용량을 초과하여 환각제를 먹이고 매달리게 하였는데 사람이기를 아예 포기한 특수부대원이라 하지만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차라리 전쟁터에서 화약내 맡으며 사람 죽이기를 하는 군인은 참 행복하겠다고 부러울 정도였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대검이나 단검으로 찔러대면 그 피줄기가 상대의 얼굴에 분수처럼 뿌려지고, 그 피비린내는 씻어도 씻어도 없어지지를 않고, 그나마 얼굴에 누더기라도 가리고 하면 다행이지만 그마저도 없을 땐 <돼지>의 분노에 찬, 이글거리는 눈으로 상대를 쏘아보는 모습은 꿈자리에서까지 나나 동료들을 악몽에 시달리게 하였다.

오전에는 보통 북한식 군 교육이여서 별로 그런 일이 없이 훈련이 진행되지만 점심시간 후 1시간의 사격훈련을 마치고 나면 그 후부터는 한국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9시까지 적군 훈련과 특수 훈련에 시달려야 했다.

사격 특기병, 자유 기자재 장비 특기병, 격술 특기병 등등 수십 가지에 이르는 특기 종목들이 대부분 실물을 놓고 훈련을 진행하였다.

훈련에 관하여 이야기 하려면 끝이 없다.

다만 여기에 내가 본 백여 명의 죽음과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죽어 간 내 동료 여러 명에 대하여서만 적으려고 한다.

어느 날 우리들의 훈련기지에 이백여 명의 죄수들이 련승으로 묶이워져서 러시아제 ‘까마즈’ 대형 트럭 3대에 실리여 왔다.

차가 트럭을 떼고 별도로 컨테이너 박스를 올려서 짐칸을 만든 차량인데 땅에 내린 죄수들의 머리에는 군대용 베개속을 씌우고, 포승으로 묶고, 그런데 그것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에는 실로 끔찍한 모습들이 비쳐졌다.

그것은 두 손을 합장하여 손바닥과 손바닥을 마주 붙이고, 손잔등에 그대로 대못을 친 다음 양쪽으로 볼트들을 채웠는데 어떤 사람들은 상처가 아물어 있고, 어떤 사람은 못을 박은 지 얼마 안 되여서인지 퉁퉁 부어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 상처가 치료도 받지 못하여 똥파리들과 구더기가 기여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쇄골과 어깨뼈 사이에 커다란 흉터들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물으니 중국에서 체포되어 중국 변방 집합소 같은 곳에 무리지어 잡혀 있다가 북한에 넘겨지기 전 북한의 담당 기관원들이 한사람에게 4명씩 달려들어 여자건 노인이건 가리지 않고 어깨뼈 사이에 강철 쇠줄을 찔러서 뒷사람과 연결하고, 그러니까 꼬챙이에 고기들을 줄줄이 꿰듯이 해서는 북으로 압송하였다는 것이다.

오래되어 상처가 아문 사람들도 있고, 잡혀온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상처가 헤쳐져 있지만 또다시 두 손에 대못을 쳐 합장되어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후에는 코도 꿰었다고 하는데 나는 코를 꿴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100m 정도에까지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왜 저렇게 손을 마주붙이고 볼트를 채웠을가? 궁금했지만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는데 다행이 고참 한명이 <쟈들, 왜 두 손에 못을 쳤는지 알어? 하늘을 믿으며 천당에 간다고 싹싹 비는 종자들인데 죽을 때까지 그렇게 잘 믿는 하늘 귀신 잘 빌라고 그렇게 해 놨다>라는 것이었다.

보기에도 너무나 참혹한 모습이였고, 지금도 생각하면 꿈속에서도 소스라쳐 놀라군 한다.

그들을 끌어다 병기 창고 옆 지하갱도에 가두었는데 그 갱도는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포탄 창고였지만 포부대가 철수 후 특수부대가 이 기지를 인계접수하면서 임시 영창으로 씌어졌고, 그 건물 끝은 생화학무기 훈련장이었다.

군인을 가두는 영창이 없어지면서 비여 있는 그 건물에 죄수들이 가득차고 20여명이면 발 옮길 자리도 없는 좁은 칸에 40여명을 처넣으니 돌아앉기도 힘들어 보이였다.

<사람이 아니다. 돼지다><사람이 아니다. 민족 반역자다.><사람이 아니다. 철천지원수다.> 등 상관이 요구하는 대로 나도 이것을 머리에 인 박으려고 무진애를 썼지만 심장만 후두둑 뛰고 멍들고, 찟기고, 터지고, 허기지고, 남루한 그들의 모습이 눈에서 환각처럼 다가오고, 보지 않으려고 무진애를 썼지만 내 발등을 바라보는데도 내 발등조차 그들의 얼굴이 되어 다가왔다.

1개 분대가 완전 중무장하고 경비를 섰다.

그날 밤 잠자리는 내 인생에서 참으로 지겨운 밤의 잠자리였다.

이제 몇년만 지나면 20대에 올라서는 청년기라 할 수 있는 그 시절에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상스러운 말로 하루 종일 훈련에 지치고도 아침 기상과 함께 조별로 산기슭에 뛰어 가 집체로 오줌을 갈기면 2-3m 앞에 기와장을 세워놓고 누구 오줌발이 더 세서 그 기와를 넘어 뜨리는가 내기를 할 정도로 힘이 남아 돌때였지만 그래서 훈련을 시키는 교관조차도 이놈들아 조금만, 조금만 늦추자고 할 정도로 스스로들 고강도의 훈련을 자처하던 우리들이였는데 그날의 그 모습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 하나뿐 아닌 전체 대원들이 천막 속에서 잠들지 못하며 뒤치락거리었다.

동정에 대한 그 어떤 표현이나 감정도 가질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옆에 누운 친한 동료에게조차 자신의 생각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었고, 동료들의 눈을 쳐다보면 그들 역시 나와 똑 같은 생각들이였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날 오후부터 창격술, 격술, 사격 등 매 훈련장에 직경 30cm 이상되는 참나무나 이깔나무들로 말뚝이 박히기 시작하였고 그 말뚝을 30m 반경으로 철조망이 쳐지더니 각자 맡은 개인 특기 훈련이 시작되면서 <돼지>들이 경비병들에게 끌려나와 말뚝에 묶여 졌다.

오전에 그들의 손에 채워졌던 나사 볼트를 다 풀어서 우리가 무기소제에 쓰던 걸레 천들이 지급되어 대부분 상처들을 처매고 있었지만 그 누더기 위로 피들이 스며 나와 피가 질벅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 보는 감정이 또 달라진다.

두 손을 합장해서 볼트로 채웠을 때와 그것을 풀었을 때 두 팔이 자유로우니 사람으로 보였다. <돼지>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인 것이다.

<동정을 버리자, 사람이 아니다.>를 속으로 외치고 또 외치며 이제는 증오로 바라보아야 했다.

허약한 사람들은 대부분 하루나 이틀 만에 맞아 죽거나 찢어져 죽었는데, 격술 훈련장에서 5일을 견디는 대단한 사람도 있었다.

하루만에 죽어 나가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한다. 그만큼 고통이 덜하니까.

때려죽이고, 사지를 갈라 죽이고, 창검에 수십 곳을 찔려서 죽고, 두 눈알이 뽑아져 따라 나온 심줄이 20-30cm 데룽거리고 배 갈라져 창자가 쏟아져 본인 발등까지 드리워져 있고...

이 모든 것들이 환각제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그 환각이 다 풀리면 내가 언제 사람을 죽였나 싶고, 어떤 군인은 아예 넋이 나가버려서 헛소리를 해대거나 정신이 이상해져서 히죽히죽 웃어대는 군인도 있었다.

이래 죽고, 저래 죽은 사람들 중 건강이 튼튼한 사람들은 또 어데론가 실려 간다.

들려오는 말이 그들의 장기를 축출해 내고 기름을 짠다고 하였지만 내가 본 일은 없다.

시체 처리가 미처 이루어지지 않아 컨테이너 비슷한 철통 속에 시체를 넣고 폐유를 부어 이틀정도 불에 태우는데 그것을 표현해 보면 낡은 타이어를 태우면 검은 연기와 재들이 날리고 불길이 검게 보이는데 마치 사람을 태우는 것이 타이어 태우는 것 같이 보이였다.

뼈를 태우는 군인들은 훈련병이 아닌 보장병들이었는데 10mm 철근을 2m가량 잘라서 갈구리를 만들어 시체들을 뒤적거리면서 너무 오래 탄다고 투덜거리었다.

한 달에 보통 열흘에 한번이나, 보름에 한 번씩 시체들을 모아 두었다가 이런식으로 태웠는데 인원수가 많으면 일주일에 한번 태울 때도 있었다.

내가 그 기지에 있었던 6개월 동안 우리 훈련장에서만 종교, 미신, 탈북 등 이렇게 <돼지>로 죽어 간 사람이 백여 명이다.

어떤 경우에는 시체가 넘치는데도 30-50명 정도 훈련장 구석에 줄 맞추어 눕혀 둔다.

건강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몸에서 천쪼각들을 다 걷어내고 살덩어리들만 줄 맞추어 놓았는데 훈련병들의 담력이 약해지므로 담력 키우기를 한다면서 매일 새벽 기상하여 조기훈련이 끝나고 식사하러 가기 전에 그 시체사이를 통과하게 한다.

맑은 정신에 썩어 문드러진 시체들의 고약한 냄새를 맡고 밥 먹으려니 처음에는 구역질이 나서 못 먹겠는데, 하도 배고프니 아무생각 없이 빨리빨리 먹으니 밥이 넘어갔다.

밥 먹고 나오면서도 그 시체 사이로 걸어 나와야 한다.

아침 훈련 시작 전 점검과 검열이 끝나면 또 그 시체가운데 빈 공간에서 10분 정도 선동원이 군사 훈련을 잘하자는 정치 선동을 한다.

꼬박 열흘을 매일 그걸 겪으니 마치 어느 들녘에 차에 찢겨 던져진 들개의 썩은 더미처럼 보이였고,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들에도 그렇게 배정된다고 하였고 그나마 우리에게는 적게 온다는 것이다.

일단 사형수나 무기수로 찍히면 그는 영낙없는 군사 훈련용이 되어 버리고 사람이기를 상실한다. 나는 사격 훈련병이었고, 나와 가까운 친구는 격술 훈련병이었는데 자기들 훈련장에 간첩으로 끌려온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고, 한국에서 북으로 월북했다가 하나님 소리를 한 바람에 끌려와 처형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모이면 우리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이번에는 어떤 <돼지>를 어떻게 처리하였다는 소리들밖에 나오는 것이 없었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리면 이 머릿속에 박혀있는 그때의 사람들과 참상들을 그림으로라도 다 그려 말하고 싶다.

2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어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심장이 돌덩어리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하는데 나도 인간이기에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심장이 떨려온다.

인간의 정신력이나 의지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뛰어난 군인도, 제 아무리 인간병기라 불리워지는 군인들도 인간인데 어쩔 수 없는 생리적 현상이 아니겠는가?

자신들에게 배당되는 <돼지>들을 처치하다보니 환각제의 악몽 속에서도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몇몇 군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악몽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적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이 한 행위에 스스로 비관하면서 제 머리에 총을 쏴버린 변중위(21세),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어버린 이중위(22세), 왼손으로 자기 오른손을 도끼로 찍어버린 박소위(19세), ‘너도 사람이냐!’를 외치며 <돼지>잡이를 파리잡이 하듯 해버리는 동료를 쏘아 죽이고 AK소총을 자기 심장에 당겨 버린 최소위(19세), 또한 하늘 믿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 아닌 정상 사람인데 왜 죽이느냐고 주위의 동료들과 불만을 늘여 놓다가 보위부에 보고되어 어데론가 끌려간 최소위(20세), 박중위(21세), 또한 김상위(23세)는 같은 고향사람이라고 먹을 걸 주거나 담배를 물려주며 동정하다가 어데론가 끌려갔다.

나도 하마터면 처벌 받을 번 하였다.

이런 사건이 계속 나타나자 그 기지에서의 8개월 훈련이 채 끝나기도 전에 6개월만에 기지를 페쇄하고 각 팀들을 분산하여 우리조는 백두산 밑 삼지연 기지로 옮겨 새로운 훈련을 시작하였고, 다른 팀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사람들이여! 이 세상 그 어디에 종교를 가졌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사람들을 이렇게 처형하는 나라가 있는가?

북한헌법 5장 68조인가에 북한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다.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 건물을 짓거나 종교 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 질서를 해치는데 이용할 수 없다.>

조항이 이렇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통제를 하며, 처형하는데도 새순이 자라듯 계속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북한 종교의 현실이다.

어찌 보면 나의 군 생활기간에 유별나게 종교인들과의 부딪침이 많았던 것 같다.

80년대 말까지 한국의 조직폭력단체들에서 3국을 통해 비밀리에 북한에 들어와 특수훈련을 받는 인원들이 종종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나 자체도 자세히 모르지만 다만 그들이 킬러로서의 특수 훈련을 3개월이나 6개월, 최고 10개월까지 북한 특수기관에서 집중교육을 받으며 그때 시기 한화로 한 사람이 3개월 교육비가 5만 달러 정도가 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전 세계의 무장 조직단체들에서 북한에 특수훈련을 받으러 가고, 해외에 북한군 군사교육고문단이 많이 나가는 것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일이다.

세계 각국 150여개 나라에 파견되어 그곳 정부세력이든 반란 세력이든 돈이 되는 것이면 닥치는 대로 맡아 가르치거나, 작전에 참가하고, 그러고도 모자라 북한에 끌어들여 가르치는 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북한군에 근무했던 군관 출신들은 잘 알겠지만 북한군내 각 군 군사대학들과 수많은 군관학교들에는 동양계, 아랍계, 아프리카계, 유럽계의 피부가 다른 수많은 유학군인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60년대, 70년대에는 한국에도 내려와 여러 반정부 단체나 조직들은 직접 현지에서 교육시켰다고 내가 교육받을 당시 참가자들이 증언하였다.

한국뿐만 아니라 재일 동포들도 북한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하여 의사, 교사, 체육인, 음악인으로 위장시켜 일본에도 수백, 수천명이 파견되어 활동 한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종교와 관련되어 처형되거나 제재를 당하는 경우를 목격하였다.

많은 사연 중에 하나만을 적겠다.

90년대초 구소련의 해체로 아제르바이잔과 그루지야, 아르메니아가 독립하자 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에 불과하던 체첸이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소련의 대붕괴로 수세에 몰려 있던 러시아 군 사령부는 체첸 전쟁에까지 시달리며 10여 년간 끌어오다 대패한 아프가니스탄 수습을 본래의 계획대로 진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당시 전쟁에서 패배하였어도 아프간 땅에는 수많은 소련군이 남아 있었다.

정부가 먹을 것조차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철수한다 하여도 마땅히 소련 영토 내에서 오합지졸 부대들을 관리할 형편이 못되었던지라 그 바람에 아프간에 남아 있는 소련군 부대들은 도깨비 무리가 되어 도적질과 약탈, 마약에 쪄들어 가고 있었다.

아프간전쟁시기 김일성은 소련군을 지원한다고 1개 여단의 북한군 특수부대를 아프간에 극비밀리에 파견하였는데 아프간에서의 이들의 공적에 대하여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체첸 전쟁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아프간에 남아있는 소련군 일부 병력을 러시아 땅에까지 무사히 귀국시킬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이 북한군 특수여단의 임무였다.

그러나 당시 김일성은 북한특수여단을 철수시키지 말아달라고 하는 소련 최고사령부 요구를 무시하고 특수여단에 북한으로 귀대할 것을 명령하였다.

내가 한국에 대하여 크게 마음 상한 것이 하나 있다.

한국은 군과 관련해서 그 어떤 작전이든 한미 연합사의 허가 하에서만 진행된다.

내나라 땅에서 내나라 군대가 남의나라 군대에게 명령을 받고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이 비극을 약소국의 설음에만 비길 것이 아닌 자주권을 잃고 애국심마저 잃어버린 이 민족의 고통이 아닐가 생각해 본다.

그런데도 그러한 아픔과 설음을 북한 탓에 돌리며 평생 미국에 매달려야만 그땅이 지켜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한국에 너무나 많다.

내 집을 왜 남에게 지켜달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소련군 최고 사령부의 요구는 철수시킬 수 없다는 요구였으나, 김일성의 완강한 거부에 할 수 없이 응하게 되었다.

아프간에서 퇴각하는 구 소련군의 후위를 믿음직하게 지켜낸 것이 이 특수 여단이다.

당시 붕괴되어 가는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구소련 최고사령부가 소련군 15개 군단의 장비를 제공할 것이니 이 특수여단을 러시아 측에 넘겨 달라고 김일성을 압박할 정도이면 가히 이 부대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것이다.

과거 구소련이 북한의 천재적인 군사가들을 돈으로 사겠다고 제안해 온 것은 수십여 건이다.

일반인들도 알고 있는 당시 민족 보위상(지금의 무력부장)이였던 김창봉이 숙청되었을 때와 오극렬이 총 참모장직에서 좌천되어 처음 쿠바대사관 무관으로 쫓겨 갔다가 돌아올 즈음에도 러시아의 요청을 받았던 국제 군사세계에선 제노라 하는 고급두뇌출신들이다.

이러한 이들도 15개 군단의 전력과 맞바꿀 비용은 안 된다.

그러나 일개의 전투여단을 15개 정예군 군단 전력과 바꾸려고 했다는 것은 이들의 전투력과 정신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김일성은 끝까지 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이들과 휩쓸려 이 여단을 몽골과 중국을 가로 질러 구소련 극동을 거쳐 북한으로 귀대시키는 임무를 여러달 동안이나 수행하였다.

아무리 동맹국의 협조하에라도 그들의 영토 안에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특수부대를 그것도 1만이라는 대병력을 한꺼번에 극비밀로 움직일 수는 없다.

소부대로 나뉘여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적대국들에 탐지되지 않게 은밀하게 철수시키는 데는 최대의 안전과 조심, 비밀보장이 요구되었다.

나는 내 일생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아프간전쟁이 휩쓸고 간 전쟁터에서, 재 가루만 날리는 격전장에서, 3개월이나 내 목숨을 거기에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여러 차례의 위험한 순간들을 넘기면서 내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프간전쟁에서 소련군을 위해 지원된 부대들은 수개의 나라가 된다.

그 중에서도 북한군의 무자비성과 공포스러운 전투 진행은 아랍인들에겐 최대의 위협이었다.

가령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에서 북한군 참전병들의 용맹성은 미국도 혀를 내두른 수준이었다.

내가 군관 학교에 있을 때 여러 명의 강연자들이 학교에 왔었는데 이들은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한국군 포로 출신들이었다.

물론 북한정부의 강요로 짜여진 각본대로 당시의 전쟁담을 들려주었겠지만 외국에 나와 여러 베트남전 참가자들의 당시의 추억과 여담을 통해서 베트남전에서 북한군이 용맹하게 싸운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우리 민족이 남과 북이라는 걸 떠나서, 공산군과 국방군이라는 걸 떠나서도 우리 한 민족을 가만히 보면 머리도 좋고, 배짱도 좋고, 용감성이나 대담성이나 집단성이나 모든 면에서 세계적으로도 강한 민족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한국군 역시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여느 참전국들과는 확연히 틀리게 맡은바 임무를 잘 수행한다.

내가 잠간 목격한 바 있는 동티모르 파병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남, 북을 떠나서 우리 민족이 참 대단함을 느꼈고, 자이툰이나 이라크에서 보여준 한국군의 모습에서도 나도 옛 군인으로서의 뿌듯함을 느끼며 빨리 통일이 되어 남북이 하나의 군대로 세상에서 제일 강한 군대로 우뚝 섰으면 참 좋겠다하는 소원을 가져보기도 했었다.

얼마 전 보여준 소말리아 해적소탕작전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78년부터 89년까지의 10년 넘게 계속된 아프간 전쟁은 2백만 명이라는 죽음을 치르고도 93년까지 여전히 내란은 벌어졌다.

카불 북방의 자그마한 산맥에 둥지를 틀고 있던 북한군 특수여단의 기본 전투임무는 소련군을 가지고는 도저히 무자히딘 모슬렘 게릴라 부대들을 이길 수 없어 소련군 국방부의 특별요청으로 파견된 최정예부대로서 게릴라 소탕전이 주요 임무였다.

그 작전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보다는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중점은 앞에서도 이야기한 수없이 죽어간 종교인들에 대한 생각 때문이고, 그중 한 가지 기억으로서 나자체도 믿어지지 않을 일이지만 어느 날 교전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던 북한군 대원6명을 구출하는 작전에서 있었던 이야기하나를 하려는데 있다.

교전 현장에서 최대의 상황에선 어떤 경우는 우리들 스스로가 동료의 심장에 총알을 박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동지에 대한 최대의 배려이고, 임무수행에서의 절대적인 원칙일 수도 있다.

사사로운 동정 때문에 규칙을 어긴다면 다른 동지들의 귀중한 목숨을 더 잃게 되거나, 나아가서는 맡은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며, 그러면 더 큰문제가 생긴다.

군인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하며 존재한다.

받은 명령에 대하여 토를 달거나, 불만을 품거나, 어떤 이유를 대거나 수행하지 못하거나 그래서 어떤 현상이 벌어진다면 당연히 그 후과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이며 그런 군인은 훌륭한 군인이라 할 수 없다.

어떻게 동료가 동료의 머리나 심장에 총알을 박아야 하는가, 심장이 떨리지 않는가 하겠지만 그걸 해야 하는 산자의 심장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심장이 죽어가는 동료보다 더 아프고 더 고통스럽다.

죽은 자는 죽어서 행복하고, 산자는 그 죽은 자를 죽였기 때문에 그 고통이 더 큰 것이다.

다른 대원들은 다 빠져 나왔지만 6명의 대원이 총탄 속에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전쟁터에서 동료에 대한 최고의 예우는 그들이 죽었을 때, 그들의 시체를 묻어 주는 것이 최고의 예우이고, 의리이며, 조건이 된다면 조총까지 쏴주면 최대의 축복이다.

쓰러진 1명에 두명씩의 구출조가 투입 되였다.

수십명이 뒤에서 엄호를 해 준다고 하지만 전쟁터를 경험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총알이란 놈이 참 명물이다. 깊이 숨는다고 피해가거나, 드러났다고 해서 다 죽이는게 아니다.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어찌해도 산다. 이게 전쟁의 생리이다.

총알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수메터 옆에서 수류탄이 튀고 하는데도 살 놈은 파편 조각하나 박힌데 없이 생생한데, 살겠다고 콘크리트나 대피호에 꼭꼭 박혀 머리를 내밀지 못하던 사람이 오히려 뒤통수에 총알이 박혀 두개골이 빠개지고, 골수와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나와 한 친구가 어떤 대원을 수습하는데 이 친구는 나보다 4살이나 더 많은 대위였고 고참이었다.

아프간에서 자그만치 3년을 버텨냈다고 하는데 이제 몇 달 후면 집에 돌아간다고, 같은 함경도 내기라고 나를 각별히 대해주던 친구이고, 어쩌다 이렇게 코털도 안 돋은 애숭이가 이런 험한 곳에 다니느냐, 목숨 주의해라, 늘 걱정해 주었고 한창 배고픈 나에게 짬짬이 군입질거리를 몰래 찔러주기도 하고, 아프간 산지에서 딴 꿀이라면서 수통에 풀어 넣어주기까지 했으며, 휴식할 때면 아프간에서 겪은 일, 북에서 살던 일, 등등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니지만 오랜 친구같이 지내던 친구였다.

함경도내기가 흔치 않았던 그 부대에서 철수 보장을 나온 인원 중에 함경도 내기가 있다고 해서 일부러 찾아와 인상 좋은 웃음을 환하게 담고 <꼬마야 반갑다>하던 모습이 지금도 때때로 떠오른다.

내가 지능적으로 뛰어나거나 감각이 뛰어나는 축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지막 숨을 겨우 톱고 있는 그를 바라보면서 불쑥 내 머리를 치는게 있었다.

그것은 그 친구와 항상 있을 때면 몰래 담배 곽을 보여주며 눈을 찡긋거리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또한 언젠가 그 물건을 보고 내가 <헹님에, 그거 개지구 들어갔단 떨거덕(목 날아 간다는 뜻) 할텐데 어쩔라고 그랍니까> 했었고, 이 친구는 <다 꽁치지 않게(숨긴다는 뜻) 허는 방법이 있어>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했었다.

나는 재빨리 함께 투입된 대원에게 살릴 수 있을 것 같으니 약품과 위생병을 데려오라고 보내고 재빨리 그 담배 곽을 찾아 내 몸에 숨기였다.

위생병이 뛰어왔을 땐 이미 그 친구는 숨이 끊어진 뒤였고, 량쪽 겨드랑이에 그 친구의 소총 띠를 잘라 지게처럼 걸어서 질질 끌고 은폐 장소까지 왔다.

담배 곽을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몰래 열어 보니 그 안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진인 듯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특수부대대원은 원칙적으로 해외 근무 중에는 사적인 물건을 일체 휴대할 수 없다.

사진을 비롯한 노동당 당원증까지도 보관하는데 이 대원은 어떻게 사진을 몰래 보관하였을까?

담배곽에 씌어진 문구가 지금도 생생하다.

본인이 새긴 것인지 아니면 그 물건을 구할 때 새겨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앗쌀라루 알라이쿰!>이라고 아랍어로 새겨진 이 문구는 <평화를 그대에게!>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밑에 또 한 줄의 글이 씌어 있었는데 <인샤 아알라>라는 아랍어인데 번역하면 <하나님이 원하신다면>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북한특수부대 대위의 물건에서 나온 이 글은 정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의 몸에서 나온 것을 그대로 보고하면 이 사람은 훈장은 고사하고 역적이 될 것이며, 일가족 모두는 정치범 수용소로 갈 것이다.

나중에 함께 투입되었던 군인이 <너 그때 시체에서 뭘 꺼내서 꼼쳤지?> 하였다.

눈치 백단이라 당시 나의 행동을 본 것이다.

<알루미늄 담배 곽이었는데 거기에 아편덩이 엄지 손톱만한 게 있는 걸 봤었는데 다른 친구가 종처가 난 것이 있어서 거기에 발라주려고 그걸 건사했다>고 하였더니 다행히 이 대원이 <임마, 그래도 그렇지 죽은 사람 물건을 먹어버리냐(슬쩍해 버린다는 뜻), 그러지 마라, 예의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꼭 고치겠습니다.> 얼마나 한숨이 푸후 나가던지 그 선배가 고맙기까지 하였다.

시체를 북으로 보낼 때 마음 같아서는 그 물건을 거기에 함께 보내고 싶은데, 고인이 애용하던 물건인데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살아있는 그 친구의 부모들과 형제들을 위해서는 그럴 수 없는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야기 도중에 불쑥불쑥 하나님 소리가 튀어 나왔는데 그때마다 내가 <아니 형, 미신 믿어요?> 할 때면 말을 얼버무리며 말꼬리를 돌리곤 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친구가 코란,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보는 성경책 내용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당시에는 그게 뭔 귀신 방귀뀌는 소리냐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유품을 처리한 덕에 그의 일가족들은 혁명 열사의 유가족이라는 최고의 영광과 기쁨을 누리고 산다.

그 군인은 아프간 참전 3년이 넘는데다 특수부대의 대위이고 당에 대한 충실성이 그 누구보다도 높은데 어떻게 되어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받아 들였는지는 지금도 궁금하다.

북한 최고의 용병이 어떻게 되여 하나님을 가슴에 품었는지, 김일성의 사상으로 최고로 무장된 군인이 어떻게 자신의 육체 한 부분에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새겨서 만든 물건을 감히 가지고 다녔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담배 곽만 나왔다면 전투 중에 주은 것이라 하겠지만 가족사진들이 붙어 있고 칼로 새겨 놓은 것이 분명한데야 그 사람의 마음을 새긴 것이라 믿지 않을 사람이 어데 있을까?

나는 북한에서 종교인들 어디서, 어떻게, 언제 처형하였는지는 다는 모른다.

나는 다만 여기에 내 군복무 중에 미신 믿고, 하늘 믿고, 그래서 죽어 간, 내가 체험한 몇 가지만을 적었을 뿐이다.

내가 이글을 쓴 이유는 두 가지이다.

종교에 대하여 전혀 모르면서 그리고 외국에서 열심히 찬양하고, 열심히 노래 부르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고, 이런 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네들은 모든 자유가 박탈된 감옥에서까지 마음대로 소리높이 하나님을 불러대는데 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맞아죽고, 불에 태워 죽고, 찢어져 죽고, 등 억울하게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에 대하여 미안하다는 것 이렇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착하고 선한 마음 가지면 행복해진다고 하였고, 하나님은 무엇이든 다 해결해 준다고 하면서 왜 당신을 그렇게 열렬히 믿는 북한 종교인들을 단 한명도 구원하지 못하고 그들이 이렇게 억울하게 한을 품고 죽어가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가 착하고 선량하고, 행복한 사람들이라면서 하나님을 믿으면 다 천당인지 천국인지 간다면서, 어찌 보면 종교 믿는 사람들이 범죄는 더 많은 것 같다.

뭔가 잘못된 게 많은 것 같고, 이해되지 않는 게 너무나 많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좋으냐, 나쁘냐, 믿느냐, 안 믿느냐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신자이던, 아니던 똑같은 사람들,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가차 없이 죽인다는 것에 분노가 느껴지고, 당신들이 여기서 찬양가를 소리높이 부를 때, 저기 북한에서는 당신들처럼 그렇게 찬양가를 부르다가는 맞아죽고, 처참하게 처형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또한 한국의 종교 단체들에서도 북한의 종교인들에 대하여 그 어떤 이기적, 정치적 목적 수단에 이용하지 말고, 비현실적으로 논하거나 이상한 형태로 이야기를 말았으면 좋겠다.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의 영혼이 구천에 떠돌고 있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2004년도에 돈벌이 수단으로 성경책도 팔아본 사람이다.

그것으로 돈을 번건 없지만 내손으로 북한에 넘어간 건 30여권 정도인데 그것이 북한에 넘어가 어떻게 누구에게 전달되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때 그것을 나에게 요구하였던 00총국 청진 주재 군부대 외화벌이 지도원을 통해 그것을 넘겨주었고 그 후 다시 두 번째의 약속이 역시 성경책 50권, 찬송가 20권, 플라스틱으로 형광 장식된 15cm십자가 50여개의 부탁이 중국에서의 나의 체포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후 그 사람과의 연락이 다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오늘 여기서 말하자는 건 한국의 교회들이나 미국의 교회들이 이렇게 확실하고 실질적인 기독교인인지 천주교인지 전파를 하라는 것이다.

옥수수얼마, 입던 옷가지 몇가지 던져주고 북한에 종교 사업하였다고, 북한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중국의 변방 기슭이나 어슬렁대고도 북한 종교 사업 한다고 떠들어대지 말고 중국이나 3국에서 떠도는 탈북자들 몇 명 마주치고는 또 역시 북한 선교 어쩌고 하지 말고 좀 제대로 해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처럼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놈도 등에 직접 질머쥐고 했다.

물론 돈때문이 였지만.

대체로 배고픈 사람들이 종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보통 종교에 빠진다.

북에서는 대다수 미신이라고 통털어 칭하지만.

내가 귀순하기전만 하여도 종교 관련 범죄자로 잡히면 대부분 비밀리에 처형해 버리거나 인체 실험 연구소나 생화학 무기실험 장소나 특수부대 훈련용 등으로 씌어졌고, 건강한 자들로는 미사일 기지나 중요지하시설공사에 동원되고 공사가 끝나면 함께 매장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극히 일부분 공개 처형 외에는 정치범 수용소에 3대에 걸쳐 영원히 처박아 두고 중노동에 내몰고 있는 행태이다. 그렇게 통제를 하는데도 새순이 자라듯 계속 자라나는 북한의 종교 실체를 보면 종교라는 게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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