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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8일 주일] 기독교의 힘



기독교의 힘

창28:10-19




저는 어려서부터 형과 함께 한 방을 썼습니다. 제가 혼자서 방을 쓰게 된 것은 형이 군에 입대를 하면서부터 입니다. 태어나면서 20년 동안 형과 함께 방을 쓰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저의 경우 형과 저는 성격이 너무 많이 달라서 동생인 제게는 그것이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형은 모든 면에 있어서 정리를 잘 안 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은 언제나 늘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습니다. 형은 그런 것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저는 방이 좀 깨끗하게 정리가 되지 않으면 무엇이든 일이 잘 안 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다못해 형의 책상까지 정리를 할 때도 가끔 있는데 그럴 때면 여지없이 형에게 많이 혼이 나곤 했습니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고 말입니다. 동생의 서러움입니다.

저는 그렇게 자라면서 항상 꿈을 하나 꿔 왔습니다. 이다음에 내가 크면 깨끗하게 정리를 잘 해 놓고 살아야지...... 그러나 그것은 단지 방의 정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도 잘 정리를 해 나가며 살고 싶은 소망이 제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음은 물론 여러 가지 생활 속의 문제들도 하나씩 하나씩 잘 정리해 나가며 깨끗한 삶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문제를 잘 해결하고서 생활하다가 또 한 문제를 당하게 되면 또 잘 해결하고.... 그렇게 하나하나씩 모든 문제를 정리해 나가며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제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의 삶을 보면 생활 중의 문제를 하나하나 잘 정리해 나가며 사는 것은 둘째 치고 저의 집안은 물론 저의 사무실조차 잘 정리하지 못하면서 사는 것이 저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늘 복합적으로 오게 되는 삶의 여러 가지 문제 속에서 힘들어하고 마음아파 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살게 되면 모든 것이 잘 정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삶은 더 복잡해지고 그것으로 오는 삶의 무게는 더욱 더 무거워 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깨끗하게 정리하며 살고 계십니까? 집도 깨끗하게 정리해 놓고 있으며 생활 중의 많은 문제도 깨끗하게 정리하며 살고 계십니까? 아마 그렇게 사는 분들이 우리 중에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이라는 것은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그 삶이 참으로 소중한 것은 그것이 우리 각자에게 유일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일하다는 것은 한 순간에 들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숨겨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마치 씨앗이 봄에 땅에 심겨졌을 때 그것이 바로 어떤 형태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여름을 지나 자라면서 가을에 형태를 보여주듯이 점차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유일성은 어린 아이 시절에는 잘 드러나질 않습니다. 각자에게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 어린아이 때는 숨어 있던 유일성이 각자에게 일어나는 많은 사건과 상황 고난과 고통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영국의 유명한 성서학자인 윌리엄 바클레이 라는 사람의 말은 매우 정확하게 그것을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성된 인생을 제공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재료를 주신 것으로 우리가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능과 능력 같은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재료를 주셨고 또 아름답고 풍성한 세계를 제공해 주셨으며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동료를 제공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러한 재료를 가지고 가치 있는 인생을 만들어 나가라>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을 완성된 형태로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완성된 형태로서 삶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책임과 과제의 형태로 삶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라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참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은 창조 그 자체가 완성되어 우리에게 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보시기에 좋은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된 기대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완성을 향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보기에 좋다 싫다는 의미는 그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창조하신 그 본질에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마이크는 마이크로 사용될 때 이 마이크를 만든 사람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보기에 좋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이크를 갖고 싸움을 할 때 물건을 파괴하는 도구로 쓴다거나 아이들을 때리는 몽둥이로 사용한다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아주 고약한 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은 늘 자신이 기분이 나쁠 때 아이들을 때리곤 하였는데 꼭 물 컵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물 컵의 모서리로 머리를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아십니까? 컵은 물을 먹는데 사용 되어져야 합니다. 그 이외의 용도로 사용될 때 그것은 보기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고장이 났다든지 본래의 의미대로 사용되지 못한다 할 때 그것이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보기가 좋다는 것은 본래의 의도대로 사용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유일한 삶을 선물로 주셨으며 그것을 삶의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 문제들을 겪으면서 찾아 나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우리의 상황과 환경 고난과 고통까지 유익하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다른 이데올로기나 사이비 종교를 따르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은 모두 인간의 삶을 절망과 좌절로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이데올로기나 잘못된 종교들은 내가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다른 쪽으로 책임을 전가 합니다. 나의 당하는 문제가 사회 구조 때문이라고 보고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 때문이라고 믿게 합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나 잘못된 종교는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는 다른 사람 때문에 사회구조 때문에 내 삶이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이비 종교는 고통과 고난이 우리의 삶을 어렵게 만든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고난을 없애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상황은 그것이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우리의 유일성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사람들은 모두 고난과 고통을 싫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에 방해가 되는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고통 때문에 삶을 포기하고 삶의 큰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의 유일성을 파괴할 수도 있고 우리의 유일성을 드러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들 들어 어느 집안 환경이 매우 좋지 않은 가정의 형제가 여럿이 있다고 가정해 볼 때 그 형제들이 다 똑 같은 삶을 살게 되지 않습니다. 어떤 형제는 집안 환경이 좋지 않아 자신이 남들같이 좋은 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불편하며 술로써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는 그런 환경에서도 자신의 삶을 잘 만들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장승수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71년 경북 왜관에서 출생한 젊은이로 학생시절부터 자신이 매일매일 막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던 가정환경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1996년 서울대학교에 문과수석으로 입학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가 쓴 책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는 당시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어떤 사람은 그 상황으로 인해 삶이 파손되고 어떤 사람은 삶이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상황과 어려움 고통들이 한 사람의 숨겨진 유일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에는 어떤 특별한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진지한 믿음과 소망입니다.


우리는 야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곱은 삶의 여러 가지 고통스런 문제를 안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나명서부터 쌍둥이였던 형과 다퉈야 했던 사람입니다. 집안 문제 성장기의 문제 결혼 문제 자녀문제 생활 문제.... 우리가 잘 알듯이 어느 것 하나 잘 정리되어 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늘 뒤죽박죽으로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힘들어 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피해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는 길에 벌어지는 일을 기록한 장면입니다. 도망 다니는 인생 그것은 삶의 문제가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삶의 문제가 잘 정리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삶에 대한 진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소망이 있었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의 고통과 어려움의 상황을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었고 그 고통 안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삶의 진지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 성경의 모습도 결코 야곱이 축복을 받는 축복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그런 장면인 것입니다.

타인과 상황을 원망했다면 야곱에게는 유일한 삶이 드러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형만을 편애 했던 아버지를 원망했다면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했던 형 에서를 원망했다면 자신을 타향에서 고아 같은 사람을 살게 한 집안 환경을 원망했다면 그에게서는 유일한 자신의 삶은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모든 것이 나쁜 요소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하기에는 그 재료가 다 나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름다운 자신만의 유일한 삶을 만들어 나갔던 것이었습니다.

창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여기>라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야곱이 잡을 자고 있는 곳이 아닙니다. 여기라는 곳은 야곱의 고통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고난과 고통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야곱이 이제서 깨닫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문제를 해결해 주고 어려움을 물리쳐 주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모든 병이 나으며 모든 나쁜 환경이 변화 되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참된 인간을 만들어 나가는 근본적인 힘을 주는 종교입니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유일한 삶을 완성해 나가는 그런 힘을 주는 종교인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고난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질 않습니다. 항상 복잡하게 또 정신없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 문제 때문에 좌절하기도 하고 그 고통의 무게 때문에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보는 고통과 고난은 다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밑거름이 되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영성인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큰 아이를 낳을 때 이야기입니다. 결혼 때 제 아내는 몸이 무척 약했습니다. 모든 의사들이 아이를 낳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말을 할 만큼 몸이 약했습니다. 결혼 후 약한 몸을 걱정했던 장모님은 딸에게 보약을 많이 먹였고 또 어느 날은 감기가 들어 독한 감기약을 여러 날 동안 먹었습니다. 한약과 양약을 많이 복용을 했던 때에 우리 부부는 임신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의사들을 찾아갔을 때 모든 의사들은 모두 아이를 낙태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아이가 정상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아주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후 우리 가정에게 찾아 온 큰 시련이었습니다. 당시 저의 어머님께서는 병 중에 계서서 더더욱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무리였던 때였습니다.

우리 부부가 잘못된 신앙을 가졌더라면 그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아이를 정상으로 만들어 달라고.... 그리고 정상적인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바로 매일매일 찾아오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나가는 종교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힘을 얻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 때 저희 부부의 기도는 이랬습니다.

「하나님 우리 가정에 태어나는 첫 아니가 만일 정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 가정은 그런 아이들을 위해 평생 목회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불평 없이 그 길을 걷겠습니다.」

그런 기도를 드릴 때 마음이 평안해 지며 뭔가 새 힘을 얻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 어머님이 오래도록 아플 때도 집 안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때도 저는 늘 마음의 평안을 찾고 내가 가야 할 새로운 나의 삶을 찾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물었던 것입니다.


이지선이란 자매가 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유아교육과를 다니던 예쁜 여대생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2000년 7월 20일 4학년시절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음주운전자가 교통사고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게 됩니다. 고왔던 얼굴은 화상으로 모두 일그러졌고 14차례나 수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 앞에 서기조차 힘든 그런 모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뻤던 여학생에게 그런 상황은 엄청나게 큰 고통이요 절망입니다. 삶의 의미를 송두리째 뺏어버린 사건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 때부터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는 지금 보스턴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며 전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은 옛날의 그 예쁜 얼굴은 다 잃어버렸지만 그가 다시금 희망을 갖고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삶에 대한 진지한 믿음과 소망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다가오시고 지선 자매는 진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자신의 유일한 삶을 찾게 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문제로 인해 걱정하며 계십니까? 어떤 문제로 고통 받고 계십니까? 내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십니까? 삶이 많이 파괴되고 훼손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고통과 고난은 우리의 사람을 훼손하는 요소가 아닙니다. 우리의 사람을 파괴하는 요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축복된 요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지에게 유일한 삶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도록 격려해 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참 소중한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삶을 찾기 위해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우리의 삶이 많이 힘들고 고달파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귀한 삶을 살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께 묻고
그 의미를 찾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름다운 삶을 꼭 살아
우리 주님 보시기에 이름다운 삶을 꼭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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番号 題目 文件 日期 照会数
98  [2006년 4월 30일 주일] 결혼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1) 06-04-301840
97  [2006년 4월 23일 주일] 주께 엎드리는 자 06-04-251643
96  [2006년 4월 16일 주일] 무엇이 부활하는가? 06-04-161623
95  [2006년 4월 9일 주일] 잡히시던 밤의 만찬 06-04-091682
94  [2006년 3월 26일 주일] 하나님의 법을 잊지말라 06-03-261624
93  [2006년 3월 19일 주일] 옥합 깨뜨리기 06-03-191399
92  [2006년 3월 5일 주일] 세월을 아끼십시오 06-03-051513
91  [2006년 2월 19일 주일] 말씀대로 산 것 뿐인데 06-02-191344
90  [2006년 2월 12일 주일]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06-02-121180
89  [2006년 2월 5일 주일] 너무도 약한 존재이기에 06-02-051213
88  [2006년 1월 22일 주일] 충성된 종의 완성 06-01-221177
87  [2006년 1월 15일 주일] 우리교회의 헌금생활 06-01-151284
86  [2006년 1월 8일 주일] 2006년의 신앙은 06-01-081268
85  [2006년 1월 1일 주일] 내 나이 50이 넘었는데 06-01-012024
84  [2005년 12월 25일 주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05-12-251428
83  [2005년 12월 18일 주일]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05-12-18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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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2005년 11월 20일 주일] 감사의 때 05-11-201155
80  [2005년 11월 13일 주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2) 05-11-1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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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2005년 10월 9일 주일] 하나님이 살아계십니까? 05-10-091410
76  [2005년 10월 2일 주일] 교회의 사명 05-10-021266
75  [2005년 9월 4일 주일] 기독교의 힘 (2) 05-09-041767
74  [2005년 8월 28일 주일] 기독교의 힘  05-08-281266
73  [2005년 8월14일 주일] 평화통일 선교의 길 05-08-101166
72  [2005년 7월31일 주일] 백부장의 믿음 05-07-281499
71  [2005년 7월 24일 주일] 본질적 신앙 현실적 신앙 05-07-241458
70  [2005년 7월 17일 주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05-07-171183
69  [2005년 7월 10일 주일] 메시야 비밀 05-07-10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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