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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30일 주일] 조연의 아름다움



조연의 아름다움

왕하5:1-7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 생활면을 몇 주에 걸쳐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첫 시간은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갈 때 신앙의 본질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간에는 그 신앙의 실천의 장이 교회가 아닌 가정과 직장과 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그러면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려서 한자를 배우면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 한자의 모양에 관한 설명을 들어가며 한자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자가 상형문자이기에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한자공부에 있어서는 좋은 교수학습법이라 생각됩니다. 재미있게 가르치시는 선생님의 형상이 아직도 남아 있어 여러 글자에 대하여 기억할 수 있지만 특히 「사람인(人)」자에 대한 인상이 깊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인자는 서로 의지하는 두 변으로 되어진 글자로 사람은 본래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땅의 다른 동물들은 대체로 태어나면 혼자 잘 크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제 역할을 하면서 급속도로 성장을 하고 또 제 나름대로 잘 살아가게 됩니다. 지난주에 끝난 올 시즌 일본 경마대회에서 7전7승 무패로 3관왕을 차지한 디프 임펙트라는 말은 경마를 좋아하는 일본인을 무척 놀라게 하였습니다. 디프 임팩트의 달리는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의 나이가 불과 세 살이었다는 것이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은 혼자 밥 먹을 수 있을 때까지 4-5년이 걸리고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며 살기까지는 약 30년이 걸리는데 말은 3년이면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30년이 되도록 남의 도움을 받아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만큼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한자의 「人」은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슈바이쳐 박사가 참 좋습니다. 1875년 독일 스트라스 부르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철학과 신학 박사였고 촉망받았던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가르치던 1906년 그의 나이 31세에 쓴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 라는 그의 책은 당시 세계 신학계에 큰 반항을 일으키며 촉망받는 신학자로 여겨졌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바하의 오르간 곡을 가장 잘 해석하며 연주한다는 평을 받았던 오르가니스트인 그가 1905년 그의 나이 30에 발표한 <바하 음악가이자 시인>이라는 그의 연구논문은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연주와 논문 둘 다 바하의 최고 전문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 30이 넘어서는 남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소신 때문에 그는 그 모든 찬사와 영광을 버리고 다시 의학공부를 하였고 남은 생을 아프리카에 가서 의술을 베풀며 살게 됩니다.

저는 그의 <성취된 유능>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의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을 포기한 삶이 좋습니다. 그는 1928년에 괴테상을 받은 것과 1952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그 상 때문에 그가 훌륭해 보이거나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갖고 있던 것을 남을 위해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진정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 용기 앞에 괴테상과 노벨평화상은 오히려 초라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30까지는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다가 30이 넘으면 남을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모습일진대 슈바이쳐 같은 사람이 그렇게도 위대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그런 모습이 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사람의 본질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하와를 만들어 주면서 돕는 자 라고 하였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넘어 첫 공동체를 만들어 주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본질을 잊고 있기에 우리들은 본래의 모습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바로 이기주의와 성취욕에 다른 인간성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기주의란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좀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시각으로 본다면 훨씬 더 정확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이기주의 그것은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수단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를 위해 움직이고 나를 성공시키기 위해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이런 이기주의가 들어가게 되면 정말 이상한 믿음의 형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조차도 나를 돕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중심에 서 있고 하나님은 내 주위에서 나를 돕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 인간을 남을 돕는 존재로 만드셨고 그런 삶의 아름다움을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인물들은 사실 많은 단점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훌륭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훌륭하게 만든 사람들이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모세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모세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핸디켑을 갖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아론이라는 사람을 붙여 주었습니다. 모세의 약점을 도왔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는 갈렙이라는 동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믿음의 친구 요나단이 있었고 바울은 든든한 후원자 바나바가 있었으며 예수님조차도 예수님 때문에 죽었던 세례요한이라는 선지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이러한 조연들 때문에 아름답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조연들의 역할은 무척 미미해 보이지만 그러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람을 살리고 때로는 가정을 살리고 때로는 나라를 살리고 때로는 역사를 이끌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에 정탐꾼 두 사람을 보냈을 때 그 정탐꾼을 감춰주었던 기생 라합은 그 신분이 무척 천하고 미미한 존재였으나 역사를 바꾸는 일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문둥병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때는 B.C. 850년 경. 아람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계속 이어지던 때입니다. 아람이라는 곳은 지금의 이스라엘의 북 쪽 다마스커스지역(시리아)으로 그 지역에 있었던 옛 나라의 이름입니다. 그 나라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은 부족함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람 왕이 그에게 군대의 지휘봉을 계속 맡길 정도면 그가 얼마나 유능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점점 썩어 들어가는 살을 보면서 그는 한탄을 하고 근심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한 계집종이 이스라엘 땅 사마리아에 가면 주인님을 구원할만한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한 나라의 군대장관이 전쟁터에서 사로잡아 온 노예 계집종의 말을 들을 리 없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 말을 들었다는 것은 나아만이 얼마나 걱정이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처럼 자신의 문둥병 때문에 아마도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16년 전 어머님께서 쓰러지셨을 때 안 해 본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충청북도 음성 땅에 침을 잘 놓는 할아버지 한 분 있다는 소문을 주간잡지에서 보았습니다. 그 분은 의사도 아니었고 침놓는 면허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수소문해서 그 분에게 찾아가 어머님을 모시고 침을 무척 많이 맞게 해 드렸습니다. 저는 원래 민간요법이라든지 면허가 없는 의사에게 가는 것은 무척 싫어하는 사람입니다만 그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아마 나아만이 지금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히브리 계집종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왔을 것이고 화려한 행렬을 준비하여 사마리아 땅으로 갔던 것입니다.

히브리 계집종 그는 참으로 중요한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만큼 미미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영화로 말하면 조연입니다. 아니 조연도 못되는 단역 엑스트라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 한마디가 한 사람을 살렸고 결국 아람과 이스라엘 두 나라를 살렸습니다. 나아만이 하나님을 믿게 되고 이스라엘과 아람 두 나라는 화해를 했던 것입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다(왕하5:15)」고 말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된 것입니다.

왕하5:15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이름 없는 한 계집종의 짧은 말 한마디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빌립이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나다나엘을 살릴 때 그가 한 말은 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을 단 한 마디 했을 뿐입니다.

「와 보라!」

언제나 생명을 살리는 말은 길지 않다. 언제나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말은 길지 않습니다. 말이 길지 않다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남을 돕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남에게 용기를 주는 일과 남에게 희망을 주는 일은 결코 긴 시간이나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마음이 이기주의로 변했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리학계에서도 오래도록 효과적으로 남을 돕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해 왔습니다. 어떤 행위를 할 때 상대방이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고 생리적으로 건강한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연구입니다. 그런데 그 연구하는 중에 의외의 반응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어 떤 말을 들을 때 긴장이 풀어지고 기쁨을 느끼고 건강한 생활을 한 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힘들지?」 라는 한 마디 입니다.

정신적인 치료를 요하는 사람들이 현대에 참 많이 있습니다. 많은 일들과 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힘든 사람들이 정신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그들에게 주위의 사람들이 「힘들지?」 라는 말만 평소에 많이 해 주었어도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힘들지?」 라는 말은 모든 정신질환을 예방하는 힘이 있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왜 이렇게 힘이 드는 줄 아십니까? 모두가 주연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일등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일등이 되라고 늘 말합니다. 2등은 살아남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유능한 인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세상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완벽해지지 않습니다. 부족합니다. 1등이 많아 먹여 살리는 사람이 많아진다 해도 그래서 삶이 편안해 물질적 혜택을 많이 누린다 해도 그것이 세상을 좋게 바꾸지 못합니다. 세상 살 맛은 물질의 풍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주연이 많아서 세상을 더 험악해 지고 더 치열해 지고 도 삭막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늘 경험하고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을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일등이 되고자 애 쓰는 것이 이 세상의 가치관이라면 하나님의 가치관은 주연이 아닌 조연이 되라는 것입니다. 조연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칼 브라텐(C.E. Braaten)이라는 선교학자는 현대를 다원적 악령주의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그 표현이 놀라운 것은 그가 말하는 그 악령은 바로 인간의 자기중심적 삶이 바로 악령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표현이 너무 정확하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닌 악령이 들어와 있으니 자기중심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시대의 최고의 기독교 석학이라고 하는 철학자인 프린시 쉐퍼(Francic A.Schaeffer)는 「절망의 경계선은 이미 넘었다」고 말합니다. 현대인의 이기주의를 염려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기주의는 기독교인들의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1000만 명이 있고 일본에도 한국 교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동경과 수도권에 300개는 족히 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사람 가는 곳에 중국집 생기고 한국사람 가는 곳에 교회 생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회에 미친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인데 그런데 왜 가는 곳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칼 브라텐의 말을 빌리면 교회 안에 악령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악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연이 되고 싶은 이기주의 때문에 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조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연을 빛내주는 조연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살리는 일에 남을 돕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세상은 조연의 역할을 기뻐하는 우리들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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