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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9일 주일] 하나님이 살아계십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십니까?


시11:1-7





오늘부터 저는 몇 주간에 걸쳐 기독교인의 생활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명령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생활하면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신앙의 잘못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 그 문제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는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에 대하여 함께 다루어 보면서 이 문제를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흔히들 일본 사람들은 친절하다고 말합니다. 이 친절이란 말은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면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내면적인 것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진심이냐(本內)」 「말뿐이냐(立前)」 의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어쨌든 겉으로 들어나는 친절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주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만 한국의 비행기 스튜어디스의 서비스 보다 일본의 라면 집 종업원의 친절이 더 좋아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친절하다는 것 일본인들이 왜 친절하게 되었느냐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여러 가지의 학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학설 중 타당성이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그 첫 번째는

① 원래 일본인은 친절하다고 하는 천성론(天性論)입니다. 일본 민족은 원래 남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선량한 민족성을 갖고 태어났다는 학설입니다. 시대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이 민족성은 변하지 않아 늘 친절한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는 계몽론(啓蒙論)입니다. 동경올림픽이 열리던 1964년을 앞두고 일본은 세계 여러 나라에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것과 일본의 국민은 선진 국민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오랜 시간 계획을 하여 계몽운동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까지는 비교적 거칠고 불친절했던 일본 국민의 모습이 조금씩 조금씩 교육에 의해 바뀌어 가면서 지금과 같은 친절한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③ 세 번째는 친절하지 않으면 살지 못했다고 하는 생존론(生存論)입니다. 메이지 유신이 있었던 1868년 이전에 약 300년 이상의 사무라이 막부(幕府)시대를 거치면서 그리고 1000년 동안의 칼의 지배를 받으면서 일본의 많은 백성들은 사무라이의 칼의 무서움 앞에 살아야 했었습니다. 이 때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은 곧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곳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죽지 않으려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먼저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것인데 그런 1000년 이상의 오랜 생활의 습성이 일본인들에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친절한 모습으로 변해왔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쪽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천성론입니까? 계몽론입니까? 생존론입니까?

그러나 사회적인 관점이 아닌 종교적인 시각으로 볼 때 또 다른 관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사람들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과 친절하게 생활하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종교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견해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신도(神道)는 일본 사람들의 생활 깊은 곳에 들어 와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이 신도의 문화가 많이 들어 와 있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사람은 죽어 신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신을 모셔두는 곳이 바로 신사입니다. 이 신사에는 주로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인신신사(人神神社)로부터 출발하는데 여기에는 ① 재앙신(崇り神) 유형과 ② 현창신(顯彰神)유형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재앙신의 유형은 세상에 원한을 남기고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모신 것으로 그들을 잘 달래주지 않으면 그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병들고 화를 당하는 것은 귀신이 벌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으로부터 오는 화를 면하기 위하여 신사를 만들어 그들의 영혼을 정성스럽게 모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자신들에게 병이 들거나 나쁜 일이 닥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지명도 와까미야(若宮)이고 우리 교회 옆에는 이 와까미야 신사가 있습니다. 흔히 와까미야 하면 젊은 나이에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주는 신사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종교학자들에 의하면 이 와까미야는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비운의 죽음을 당한 사람을 말하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동네에 가끔 볼 수 있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이 와까미야 인데 그것은 그 지역에서 비운의 죽음을 당한 사람의 영혼을 잘 모셔서 살아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신사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현창신 유형의 신사는 좀 더 후대에 나타난 것으로 살아 있을 당시 훌륭한 일을 한 사람들을 죽은 후에 신사에 모셔 그들을 기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위대한 점을 닮고 싶은 마음에 신사를 만들고 그들의 혼이 자신에게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東京에 있는 明治神宮이나 京都에 있는 平安神宮은 그 대표적인 예라 볼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일본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죽은 자들의 영혼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귀신의 존재를 늘 생활 중에 믿고 있으며 그들을 잘 달래주어야 생활 중에 화를 당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요즘 일본의 TV방송에서는 호소끼(細木)카즈꼬 라는 점쟁이 여인이 아주 인기입니다. 많은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연예인들과 일반인들을 상대로 점을 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이 점쟁이 앞에서 모두들 꼼짝을 하지 못합니다. 반대의 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녀의 한 마디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떨며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일본인에게는 일본인만이 갖게 되는 특유한 종교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귀신은 우리 곁에 있다는 것과 그 귀신을 반대하는 것은 화를 받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귀신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 중에 하나가 바로 친절이라는 것이고 정직하다는 것이고 책임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일본인들이 귀신을 늘 의식하며 생활하는 것 같이 느끼십니까? 어느 정도 그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일본의 거리에 있는 수많은 신사를 볼 때 해마다 동네마다 열리는 마쯔리를 볼 때 집집마다 회사사무실마다 있는 카미다나(神棚)를 볼 때에 일본인들은 귀신과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우리는 한 가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귀신을 생각하면서 어느 정도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그것이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어느 정도 정착이 되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귀신이 내 주위에 있다는 것과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행동의 제약을 갖게 되고 그것 때문에 생활 중에 조심스런 마음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비해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귀신을 믿는 일본인들보다 나은 점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는 어느 정도 느끼고 있습니까?

일본에서 선교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고들 합니다. 아니 일본에서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적어도 통계적으로 볼 때 맞는 말입니다. 많은 선교단체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문을 닫고 철수를 했으며 수많은 교회가 선교적 열매를 맺지 못하고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일본 사람들에게 행동의 본이 되질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직성 책임의식 친절 면에서 우리는 일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이 귀신 앞에서 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 생활의 제약을 조금이라도 받는다면 그래서 그들이 정직하고 책임의식이 있고 친절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들의 생활을 배우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먼저 모방을 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특성이 있는 민족입니다. 그런 성격이 오늘날의 일본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기독교가 많이 전파되었을 때는 근대 이후의 역사적으로 보면 두 번 밖에 없었습니다. 첫 번은 메이지 유신 후에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입니다. 서양의 문화가 일본보다 발달되었다고 생각했던 그 당시 일본은 서양의 기독교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자연히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게 됩니다. 또 한 번은 일본의 패망 후 일본 보다 강한 미국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생기면서 한 때 기독교가 젊은이들에게 붐으로 일어난 때가 있었습니다. 젊은 층에서 자신들보다 강한 미국사람들의 생활 문화와 종교문화를 받아들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은 경제적인 면에서 생활의 면에서 많이 앞서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그들의 문화나 생활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일본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기대감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행실과 생활이 그들보다 우위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일본에 있는 기독교인 교회 선교단체의 딜레마인 것입니다.

일본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을 감동시킬만한 생활의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일본인보다 더 정직하고 더 책임성이 강하고 더 친절한 삶의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일본사람들이 귀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 크고 강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더 강하고 더 크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의 생활이 귀신을 믿는 일본인들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주 큰 문제인 것입니다.

직업에 따라서 생각과 행동의 차이가 있습니다. 생활양식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 서로 다른 생활양식 중에 전이가 가장 큰 직업군은 조직폭력배라고 합니다. 소위 깡패집단을 말합니다. 폭력배 3명과 일반인 3명이 함께 3달 동안 같은 방을 쓰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그것은 일반 인 3명이 조직폭력배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한다고 합니다. 겉으로라도 그렇게 생활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인보다 폭력배의 생활양식의 전이가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친구와 사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조직 폭력배하고 예수님하고 3개월간 같은 방을 쓴다고 했을 때 어느 쪽이 변하겠습니까? 분명 조직 폭력배가 변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변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예수님이 변한다면 저는 그런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3개월까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 한마디면 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 짧은 시간에 오른편에 있는 강도의 마음을 바꿔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힘인 것입니다. 분명 폭력배들이 변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더 깊은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하면서 왜 변하되지 않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셨다고 하면서 왜 우리의 삶은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이든지 아니면 우리가 조직 폭력배보다 더 악한 죄인이든지 둘 중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 것 하나만 정확이 알고 있어도 우리의 삶은 변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거짓을 행할 수 있으며 책임을 회피할 수 있으며 남에 대하여 나쁘게 말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을 다 알고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악한 생각과 음탕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생활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질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말을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것을 인식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무시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은근히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무시하고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도 무시합니다.

신사의 잡신을 믿는 일본인들도 귀신을 두려워하며 생활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계셔서 나를 지켜보고 나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나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아는 것이 바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첫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어 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매일 우리를 보고 계시는 것과 우리를 지키시는 것을 알게 하시고
그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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