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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9일 주일] 잡히시던 밤의 만찬


잡히시던 밤의 만찬

고전11:17-26




오늘은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로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죽임 당하시기까지 수난을 받은 수난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또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해서 종려주일이라고도 하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 때 「호산나」라고 외쳤다고 해서 호산나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이번 수난주간의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주일인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고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성만찬 즉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고 그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로마의 군인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날 밤새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시고는 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 오후 3시에 돌아가십니다. 그리고는 주일 아침에 부활하시게 되고 그 날을 기념하여 부활절로 지킵니다.

오늘은 수난주간의 예수님의 행적 중 특별히 목요일에 행하셨던 최후의 만찬 즉 성만찬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죽기 전 날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식사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오늘 저는 사순절을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 제자들에게 해 주신 그 교훈을 생각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성찬식은 지금도 그 의미를 찾아 제대로 하는 것이 참 쉽지는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20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많이 왜곡되고 언어적 이해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2000년이 지나지 않아도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은 초대교회에서조차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성만찬은 많이 왜곡되어 행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정나라 한 모습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대교회의 성만찬은 오늘날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거행했던 성만찬의 내용을 보면 이것은 식사와도 같은 수준의 만찬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교인들이 교회에 모일 때마다 아마도 한 끼 식사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식사였습니다.

오늘 본문 중 23-29절은 성찬식제정의 말씀으로서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듣곤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하여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나누신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 예수님의 성찬식제정의 말씀을 고린도교회의 어떤 상황에 연결시키고 있는가 하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성찬식제정의 말씀을 연결시키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본문 17-2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 17절에 보면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임이란 다름 아닌 성찬식 모임입니다. 이 거룩하고 은혜롭고 유익해야 할 성찬식 모임이 왜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가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18 19절에 보면 그들 가운데 있는 분쟁과 파당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그런 분쟁과 파당을 가지고는 함께 모여서 주님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행해진 그 성만찬을 성만찬이라 할 수 없게 만든 요인이 단지 분쟁과 파당이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더 심각하고 아주 부끄러운 일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21절에 보면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성만찬은 보통의 회식을 겸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각자 음식을 준비해서 가지고 오면 그것을 다 차려놓고 다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갖다 먹어버림으로써 남은 사람들은 먹지 못하고 배를 골아야 하는 일이 발생하곤 했던 것입니다. 음식이 베풀어진 식탁에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더 이상 남아있는 음식이 없어서 먹지도 못하고 있는데 먼저 다 갖다 먹은 사람들은 술까지 거나하게 취해 있곤 한다니 이게 무슨 주님의 성만찬이겠느냐는 사도 바울의 한탄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22절에서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했다고 한 것 보면 그 먼저 다 갖다 먹고 술까지 취하곤 했던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의 파당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렇다고 할 때 사태는 더 심각한 것입니다. 있는 사람들이 넉넉히 가져와서 없는 사람들이 먼저 충분히 먹도록 기다려줘야 할텐데 평소에 제 집에서 잘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더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바람에 가난한 사람들이 더 낙심하고 자존심 상하고 모멸감을 느끼며 분노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교회 안의 분쟁과 파당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잊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런 짓은 단지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다함께 나누는 성만찬을 그냥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자리로 아느냐? 그렇다면 밥 먹을 장소가 없어서 교회에 나왔느냐? 라고 질타하는 말이 22절 첫머리의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다시 한 번 바른 성만찬을 가르치기 위하여 내가 당신들에게 전해준 성만찬은 당신들이 지금 행하는 그런 성만찬이 아니라는 뜻으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 하면서 23절 이하의 말씀을 쓴 것입니다.

23-26절에서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한 사도 바울은 이어서 성만찬에 임하는 바른 자세에 관해 언급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한 이 만찬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여기서 우리는 성만찬이 행해지는 교회가 그저 음식으로 배를 채우기 위한 회식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계층의 차별을 없애주던 것이 교회에서의 성찬식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신분과 계층의 차이 등 사람들 사이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지 않는 성찬식은 무의미한 것일 뿐 아니라 성찬식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하나 됨의 의식과 의지와 실천적 노력이 없는 삶은 온전한 신앙의 삶이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27절에 있는 대로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며 28절에서 말하는 대로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0:16-17 에서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파당이 있고 또 그 파당이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으로 갈라진 파당이며 게다가 가진 사람들이 먼저 다 먹고 갖지 못한 사람들이 늘 굶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찬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생황이 그 옛날 고린도교회에만 있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한국소설의 고전인 <춘향전>은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돌아와 변학도의 손아귀에서 춘향이를 구해냄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바라던 대로 사랑을 성취한 춘향이가 만일 소설이 계속되어진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녀는 양반집 애첩으로서 기생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신분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낳은 자식은 어찌 되었을까요?

첩의 자식은 서자라 신분이 다르게 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소설 <홍길동전>에서는 호부호형하지도 못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서자였던 길동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했고 형들을 형이라 부르지도 못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집 떠나는 길동이 에게 아버지가 호부(아버지라 부르는 것)를 허용하고 이에 감격하여 우는 길동의 모습은 그 당시 서자라는 신분이 겪었던 처절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분 논리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사람의 차별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차별을 없애고자 오래도록 싸워 왔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 단두대에서 죽은 루이 16세의 모습은 그것을 차별을 위해 싸워 온 인간의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의 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 안에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 존재한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다시 성찬식으로 가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성찬에 참여하며 사람들 사이의 모든 장벽을 헐고 하나 됨을 실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어렵지 않게 자동적으로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같은 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써 우리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나라의 백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억지로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동적으로 오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뜻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신분을 두고 차별을 두고 구별을 해 나간다면 그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는 계급화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성찬식을 통해 다시금 그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하여 만들어 진 공동체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교회는 친교단체도 아니고 교육단체도 아닙니다. 특별히 해외에 있는 한인교회는 한국 사람들의 친목단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증거 하는 곳입니다.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복음을 배우고 복음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일본에 있으면 사람들이 교회라는 말을 잘 못 알아들을 때가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쿄-까이(敎會) 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협회(協會)라고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쿄-까이」라고 말하지 않고 꼭 「그리스도 쿄-까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에 있는 일본교회나 한인교회들은 협회와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복음증거 보다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는 그런 모임의 성격이 더 강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가족에게도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버지 같이 생각하고 있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 분은 전도사로 교회봉사를 처음 시작하는 제게 목회를 가르쳐 주신 분이셨습니다. 마치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부교역자들을 아들같이 생각하시며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에게도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분의 큰아들이 신학교 4학년 때에 수련회에 갔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게 된 것입니다. 목사님의 큰아들은 신학교 4학년 때에 다른 교회의 중등부 전도사로 봉사하였는데 그 교회의 중학생 아이들을 데리고 여름수련회에 갔다가 그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학생을 살려주고 전도사가 죽었던 것입니다.

그 후 사모님은 우리와 같은 젊은 목사나 전도사를 보실 때마다 아들을 생각하시면서 늘 우시곤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의 사모님은 꼭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어떻게 기다려....」

금년 연초에 세배를 갔을 때 이제는 연세가 80이 넘으신 사모님께서는 저를 보시고는 반갑게 맞아주시고는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깊어지자 또 아들 얘기를 하시면서 눈시울을 적시셨습니다. 그런데 이전과는 많이 달라지신 것은 그 사모님의 얼굴에는 기쁨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모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볼 수 있어!」
나이가 80이 넘으신 사모님은 이제 곧 하늘나라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볼 수 있는 소망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달 우리 교회에서는 상을 당한 가정이 두 집 있었습니다. 한 가정은 부친상이었고 또 한 가정은 모친상이었습니다. 두 집 다 상가가 한국이라서 저는 참여를 하지 못했습니다만 장례를 다 치르고 오신 집사님들은 제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른들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아버님과 어머님 때문에 평생 큰 짐이 있었는데 이제 구원을 얻고 돌아가셨다고 하는 기쁨의 고백이었습니다.

누가 예수를 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 가치를 깊이 알면 알수록 그 소중함을 알면 알수록 복음을 증거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복음으로 구원을 얻고 복음으로 새 사람이 된 사람만이 그 복음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협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친목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전하는 모임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고 하는 그 사실을 알 때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전도에 힘쓰지 않는 것은 예수로 인해 구원 얻는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인 것입니다.


사순절입니다. 오늘은 또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우리가 이 날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사순절 기간에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어떤 교훈을 다시 얻어야 합니까?

교회는 모든 사람이 구별되지 않고 차별되지 않고 하나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살을 잊고 교회를 구별된 사람들의 모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 사순절을 지내며 다시 원위치 시켜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교인은 다 하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순절을 지내며 힘써야 할 또 하나는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을 주님이 원하시는 본래의 뜻대로 지내며 부활을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잡히시던 밤 제자들과 하신 마지막 만찬에는
예수님의 깊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이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우리가 먼저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두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한 형제자매 됨을 기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기 원합니다.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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