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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8일 주일] 2006년의 신앙은


2006년의 신앙은

요21:15-17



새해가 되면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신년의 자신의 소원을 사찰이나 신사에 가서 기원합니다. 인본은 오래전부터 신도와 불교가 많은 부분 혼합이 되어 내려져 왔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잘 구분을 하지 못할 정도로 소원을 바라는 내용이나 형태가 모두 비슷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종교적 차이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소원을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繪馬를 사서 그 곳에다가 자신의 소원을 글로 쓰고 신에게 드림으로 새 해의 자신의 소망을 기원합니다.

가끔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모시고 신사나 사찰을 갈 때 저는 그 곳에 자신의 소망들을 써 놓은 사람들의 繪馬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繪馬의 내용을 보면 시험에 합격하게 해 달라든지 결혼을 하게 해 달라든지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든지 좋은 직장을 달라든지 건강하게 해 달라는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여러 가지이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새 해에는 좀 더 발전 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는 공통점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시간의 연속이고 똑같은 날이 반복될 뿐인데 사람들은 시간을 구분해 놓고 새롭게 시작되는 한 해의 첫 시간을 맞이하면서 자신에 대한 약속과 다짐을 새롭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은 새 해를 의미 있게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은 2006년 새 해에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2006년도 한 해에 어떻게 발전되고 변화되기를 바라십니까? 또 그러기 위하여 여러분들은 어떤 노력을 하려고 하십니까? 사업을 위한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직장을 위한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를 하는 학생이라면 학업을 위한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건강을 위한 계획도 있을 것입니다. 계획은 중요한 것입니다. 계획을 갖는 것은 비록 그 계획이 오래 가지 못하고 실패한다 할지라도 계획을 세워놓지 않고 새 해를 맞이하는 사람들 보다는 분명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적인 것에는 많은 계획을 세우고 또 노력하기를 다짐하면서도 정작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위해서는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에 구원을 주고 일상생활에 새 힘을 주는 것이며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주는 힘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성장이야말로 세상적인 발전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2006년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의 신앙의 발전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려 하십니까? 어떤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교회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새 해가 되면 나이를 먹는 것 같이 신앙도 성장해야 하는데 신앙의 성장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설교하셨습니다. 작년까지 주일 예배만 왔던 사람은 새 해에는 주일 저녁 예배까지 나오고 주일 저녁예배까지 나왔던 사람은 수요예배까지 나오고 수요예배까지 나왔던 사람은 새벽기도까지 나오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그 가르침은 제게는 참 신선함을 주었습니다. 복잡한 신앙을 아주 단순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좀 이상하였습니다. 그 설명은 너무 단순해서 그대로 따라가면 신앙도 단순해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배의 횟수가 신앙의 성장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관계는 있습니다만 그것으로 신앙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의 참석의 횟수는 신앙이 성장한 결과로 따라오는 모습이지 예배를 많이 참석하는 것 자체가 신앙의 성장을 가져다주거나 신앙의 성장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성경에 근거한 신앙의 성장에 대하여 제시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제가 목회를 하면서 알게 된 경험을 말하거나 저의 주관적인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신앙의 성장의 모습을 그대로 소개해 드리는 것입니다. 부디 이 말씀을 통하여 2006년 한 해를 사시면서 우리 교인들 모두가 다 신앙이 한 단계씩 높아지기를 소망합니다.

그 신앙의 성장의 단계들을 살펴보기 위하여 저는 요한복음을 기준으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처음부터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제자들이 점차 신앙이 성장되어 가는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난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의 특징은 아마도 「말씀」일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1)를 시작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1:14)는 말씀은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어 내려갈 때 놓쳐서는 아니 될 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외에 한가지 더 중요한 표현이 요한복음 1장에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와 보라」 입니다.



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첫 번째로 요구하신 것은 의외로 재미있습니다. 그것은 「와 보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제자인 안드레를 부르실 때 예수님의 유일한 한 마디는 와보라입니다. 여러분 안드레가 누구입니까? 본래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는 그 시간도 안드레는 선생님인 세례요한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세례요한의 제자라고 한다면 미루어 짐작컨대 그 당시 정치 사회적인 비판력이 상당히 있었을 것이며 여러가지 의문이 많았던 청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에게 예수님은 진리의 여러 부분들을 설명하는 것을 모두 생략한 채 그저 「와 보라」는 한마디로 안드레를 부르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보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다음입니다. 믿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보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의 안드레 전도 때 사용한 말은 「와 보라!」(1:39)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전도를 받은 안드레가 다시 자신의 형제였던 베드로를 전도할 때도 똑같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와 보라!(1:39)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 빌립을 처음 부르실 대에도 예수님은 나를 좇으라!(1:43)고 외마다 말씀만을 하십니다. 그리고 빌립이 또 나아가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도 와 보라!(1:46)고 외칩니다. 이렇듯 요한복음 1장에는 「와 보라」라는 말이 수 차례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임에서 난다(롬10:14) 했습니다.

혹 나는 아직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몰라 흥미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나와 예배는 드리지만 설교의 깊은 의미를 잘 몰라 그래서 자꾸만 교회에 나오고 싶은 마음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믿음이 들지 않아 뭔가 처음부터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여기는 분은 혹 안 계십니까? 지금은 답답하겠지만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의 길을 제 코스대로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시작은 바로 이렇게 와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어느 땐가 여러분들이 모르는 사이에 믿음을 선물로 받으실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두 번째로 강조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믿음을 두 번째로 강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나옵니다. 「믿음」이라는 명사와 「믿다」라는 동사를 합쳐서 모두 77회 나오는데 마태나 마가 누가복음에서 각각 약 20회 정도씩 나오는 것을 감안한다면 놀라우리 만치 많은 횟수입니다.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타난 믿음이란 단어를 모두 합한 것 보다 요한복음 한 권에 나타난 믿음이란 단어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닙니다. 이 횟수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가 짐작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 그 믿음이라는 단어가 주로 요한복음의 중간부분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다는 것입니다. 4장과 8장 그리고 11장에 믿음이란 말이 반복적으로 계속 나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열정을 가지고 예수께로 온 사람들에게 그 두 번째 단계로 믿음을 가르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주위에는 제자들을 비롯해서 각각 나름대로의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예수를 따르는 이유가 각각 달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다른 서기관들과 달라 그 가르침을 들으려 나온 사람들이 있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예수께 나왔고 어떤 이들은 떡 먹고 배부른 까닭에 계속 그 현실적인 배부름의 만족을 위해 예수를 붙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병 낳기를 위해 찾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열정을 가지고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저들의 일차적인 욕구만을 만족시키는 것이 이니라 궁극적으로 믿음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저들의 일차적 욕구를 채워주신 목적은 바로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4:2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1)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에 대한 부드러운 당부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반복되는 믿음에 대한 가르침 속에서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5-26)
라고 열정적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8:46)
이런 표현과도 같이 아주 격한 감정적 표현도 서슴지 않고 쓰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14:11)
급기야는 좀 제발 믿어달라는 호소의 성격까지 나타날 정도로 믿음에 대한 간절함까지 보여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 예수님을 찾아 나온 우리들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주 앞에 나온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중에도 주님 앞에 나오는 이유가 다 각각 다를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오래 전부터 나오던 곳이라 그저 습관에 따라 나오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혹 비록 적은 수이겠으나 떡 먹고 배부른 까닭에 여기에 나온 이들도 있을 것이요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주님을 찾은 이도 있을 것이고 교회의 자리가 탐이 나 나오는 자도 혹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 잘못된 것도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어떤 이유로든 주 앞에 나왔으면 우리는 그 다음 단계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임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그토록 열정을 다해 가르치셨던 것이고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연예하기 위해 교회에 가 앉아 있다가 예수 믿은 사람을 한 분 압니다. 대학 1학년 때 첫 미팅에서 만나 혼자서 불꽃이 튄 뒤 싫다는 여자의 말은 듣지도 않고는 9년간 자존심 다 버리고 따라다닌 의지의 한국인을 한 분 압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교회를 너무 열심히 다녔는데 그러다 보니 이 남학생이 교회에서 아예 살다시피 합니다. 예배당 뒤편에서 쭈구리고 앉아 예배도 드리고 봉사하는 아동부서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모습도 보고 수련회도 좇아가고.... 결국 그는 예수를 믿게 됩니다. 저의 동서 형님의 얘기입니다.

교회에 와 보는 사람은 이렇듯 믿음을 갖게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성전의 뜰을 밟았으면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믿음 갖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3. 세 번째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그렇게 중요하게 가르쳤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음으로 끝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믿음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달은 제자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가르쳤겠습니까?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십니다. 왜 세 번일까? 어떤 사람은 논리적 확증 차원 즉 베드로의 사랑의 대답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 세 번 물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렇게 세 번 물었다고 하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그 단어가 각각 필리아 아가페 로 달라서 사랑의 두 가지 속성을 점증적으로 묻는 것이라고 보기도합니다.

그러나 저는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예수님의 심정적 안타까움을 보고 싶습니다. 그토록 믿음을 강조해도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그렇게도 오랜 시간과 고통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겨우 믿음을 깨달은 제자 베드로에게 다시금 사랑을 일깨우는 안타까운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 세 번의 사랑의 획인 작업은 오히려 절규에 가깝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베드로는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가야 하는데 베드로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야 할 그 핍박이 정말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것인데 그것도 모르는 채 그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기쁨에 못 이겨 그 깊은 의미도 모르는 채 대답만 하는 베드로를 보며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묻고 또 묻는 것입니다.

혼자 생각해 봤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는 슬픔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픔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와 대화하는 중에 믿음까지만 있고 그 다음 단계인 사랑이 없어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2000년 뒤의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는 누구나 다 입으로 암송하는 이 가르침을 무시하고 내 욕심만을 채우는 믿음을 제일의 덕목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안타깝게 질문하고 계시는 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 이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 우리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질문이라고 믿습니다.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제발 제발 내 양을 좀 먹여다오!
여러분들은 그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십니까?
신앙의 마지막 단계는 사랑입니다. 주님을 향한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주님을 너무 사랑해 주님의 양들을 조건 없이 먹이는 그 사랑을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머리와 가슴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 주님의 양들을 먹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여러분들과 저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부하는 세계의 수많은 성도들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믿음이 너무 좋은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이 너무 좋은데 너무 좋아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있고 기도하고 바라는 대로 다 이루는 그 믿음도 있는데 한 가지 그 믿음이 믿음으로 머물러 있다는 데에 우리의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내 자신과 교회로만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원을 지었습니다. 믿음으로 교육관을 마련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교회를 비난하는 이 땅의 그 어떤 세력까지도 싸워 이겼습니다. 그 믿음의 결과 우리는 교회의 힘을 즐기고 있습니다. 교세의 크기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음은 적어도 도깨비 방망이입니다. 마음의 소원을 이루며 자녀들의 앞날을 보장해 주며 건강하고 유쾌한 삶으로 안내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사형통과 운수대통이라는 단어를 혼동하며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범사와 우리의 몸이 강건한 축복을 받으려 지금도 그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믿음이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성숙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나 이외의 또 다른 생명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오히려 많은 상처만을 가져다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새 해를 맞이하여 새롭게 신앙의 성장을 위해 애쓰기로 다짐하는 우리 교인들이 그동안 교회에만 겨우 출석하는 신앙생활을 하셨다면 올 해는 성전의 뜰을 밟는 단계에서 믿음으로 교회를 나오는 교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어려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믿음을 소유해서 그리스도의 좋은 제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까지 여러분들 중에 믿음이 있는 신앙생활 하였다면 올 해는 그 믿음이서 더 성장하여 그 믿음이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합니다. 나를 향한 믿음이 아니라 나의 소원을 이루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을 너무 너무 사랑하여 도무지 계산기로는 계산이 안 되는 그 손해와 희생을 해 가며 주님을 죽기까지 붙들고 주의 양들을 먹이는 그런 사랑의 소유자들이 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성도들아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이 질문에 가슴 저미는 마음으로 응답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욕심을 내지 맙시다. 한 번에 이 해에 완벽한 신앙을 간직하려 하지 맙시다. 그저 한 단계 한 단계 하나씩 성장해 가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멋진 신앙을 간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한 단계 더 깊어지는 신앙을 위해 노력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후 기도〉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일도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큰 욕심은 내지 않겠습니다.
그저 한 단계 씩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에 오지 않던 분들은 교회에 오는 한 해 되게 하시고
교회에 오시는 분들은 믿음을 갖게 하시며
믿음생활을 잘 하셨던 분들은
그 믿음이 변하여 시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한 단계씩 성장해 가는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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