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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19일 주일] 옥합 깨뜨리기


옥합 깨뜨리기

눅7:36-50



오늘은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우리가 사순절 기간을 지낼 때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말씀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래 된 소설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종교성이 매우 강한 한 청년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기독교에 심취해 그것을 따르다가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는데 하나님이 고난 받는 민중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많은 괴로움 끝에 신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교회를 세워 빈민 구제사업을 하게 됩니다. 빈민을 위해 강도 절도도 서슴지 않다가 자연히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면서 그는 신흥종교의 교주와도 같은 위험수위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에게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절제되고 용기 있는 삶으로 인해 많은 추종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학생은 자신의 학업마저 포기하고 그를 따르는 결단을 하고는 인생을 바꾸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 청년에게는 지울 수 없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윤리적인 문제로 항상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의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중적 생활로 인한 갈등과 자신이 따르고 있던 종교에서의 해결을 얻지 못한 허무함이 함께 얽혀 고민하다가 남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소개로 그들의 삶을 바꿔놓은 장본인이 스스로 그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삶> 하나를 해결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게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어느 교주가 그를 따르는 신도들을 남겨놓은 채 그 종교의 허무성과 거짓성을 해결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과도 같은 상황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도 같을 것입니다. 동경교회 담임목사인 제가 「내가 믿었던 기독교는 것은 거짓이었다!」 라고 유서를 써 놓고서 자살했다고 한다면 저를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신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큰 충격일 것입니다. 소설은 그런 상황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1979년도에 발간이 되어 80년대 초반 한국의 온 문단을 흔들어 놓았던 이문열씨의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민요섭이라는 인물입니다. 당시 기독교의 인사들은 이 소설의 내용이 매우 언짢아 「기독교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다」라고 항의 했지만 작가 이문열씨는 「기독교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가 갖고 있는 잘못된 점 하나를 지적하려고 썼다」라고 답변을 하였습니다. 작가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소설에서 오늘날 교회가 사람의 내면에 응어리져 있는 윤리적 도덕적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문열씨는 이 소설로 1978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고 이듬 해 1980년에는 그 소설이 영화화되어 그 해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기독교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 작품에서 깊이 다루었던 것은 인간의 윤리적 complex 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윤리적인 complex가 있는데 이 윤리적 complex 가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complex를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종교에 대한 갈망도 많아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윤리기준이 높을수록 자신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더 많이 느끼기 때문이다.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면 그 죄책감 때문에 그만큼 종교에 의해 해결을 얻으려는 마음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일본사람들을 전도하기 힘든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이 윤리의식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회가 발전하면 윤리의식이 낮아지는데 일본의 사회는 많이 발전하여 그만큼 윤리의식이 낮은 것입니다. 윤리의식이 낮다는 것은 죄의식이 없다는 것이고 죄의식이 없다는 것은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중 고등학생 이었을 때 일입니다. 교회에서 서로 사귀었던 남학생과 여학생이 손을 잡은 것 때문에 마음으로 괴로워 하다가 수련회 때에 캠프파이어 모닥불 앞에서 회개를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서로 손을 잡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만은 윤리의식이 높으면 그것으로도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 한 번은 한 여학생이 파마머리를 하고 학교에 갔다가 선배들에게 야단을 맞고 선배들로부터 둘러 쌓여 기도를 받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것 역시 윤리의식이 높은데서 오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와 신도로 대표되는 일본의 종교는 자래의 서원은 있어도 죄의 고백이나 회개는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윤리의식이 낮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complex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complex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개는 <강박관념>이나 <과도한 혐오> <고정관념> 등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complex는 원래 <복합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사람에게 처음으로 사용한 심리학자가 바로 칼 융입니다. 융은 사람의 무의식 속에 좋지 않은 감정 사고 기억의 복합체가 있어서 사람들이 그것에 얽매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 복합체가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학력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든다거나 자신의 외모 때문에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그것이 바로 complex인 것입니다. 그래서 융은 인간이 complex를 갖는 것이 아니라 complex가 인간을 갖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complex가 없으십니까?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을 방해할 만큼 여러분들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좋지 않은 감정이나 사고가 없으십니까? 혹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그 complex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돈 입니까? 성격입니까? 학력입니까? 출신입니까? 아니면 외모입니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은 항상 웃음을 잃고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패배주의자 같이 늘 힘든 표정을 하고 사셨습니다. 어느 날 그 이유를 제자인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곧 잘 해서 전교 일등을 늘 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의 법대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고시를 네 번 실패하고 또 이후에 외국으로 유학을 가려 했는데 그것마저도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결국 유학을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다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었고 또 유학을 다녀 온 친구들은 교수가 되었는데 자기만 고등학교 교사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에게는 그 경험이 큰 complex로 남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삶의 다른 것들이 풀리질 않습니다. 영향을 너무 많이 받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철없던 우리 친구들은 선생님의 그 아픔도 모르고 선생님께 별명을 붙여 드렸습니다. <우등생의 좌절된 꿈> 이라고. complex는 그만큼 일상생활까지도 힘들게 하는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complex가 많은 한 여인이 나옵니다. 깨끗하지 못한 과거와 현실 그리고 자신의 죄책감 또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도저히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눅7장과 막14장 그리고 요12장을 함께 봐야 합니다.

막14:3 -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요12:3 - 마리아는 지극히 바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각각의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배경설명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이 사건에 나오는 여인에 대한 설명과 이 사건이 말하고 있는 의도는 다 똑같습니다. 적절치 못한 직업을 갖고 죄를 많이 지었던 마리아라는 이 여인은 나드 향이 든 옥합 한 병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그 옥합 병을 깨고는 나드 향을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나드 향이란 당시 너무 비싸서 사람들이 쉽게 갖지 못하는 물건이었습니다. 동인도와 스리랑카에서만 나는 것으로 스타키스 자타만시 라는 식물에서만 조금씩 축출되는 향이었습니다. 요12:3에 보면 그 나드 향을 한 근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히브리 사람들의 한 근은 340g 으로 나드향 한 근은 당시의 가치로 300데나리온 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이 남자 어른의 일년 치 임금이니까 그것이 얼마나 비싼 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여인이 왜 나드향을 갖고 있었을까요? 몸을 팔던 여자로 자신을 꾸미기 위함이었을까요? 남자들에게 좋은 향기를 주고 싶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보다 내면적으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녀는 complex가 많은 여인입니다. 죄책감으로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내 세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옥합은 그녀에게 있어서 유일한 보상이었고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피난처였고 자랑이었습니다. 남들이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것을 소유함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위로를 얻었던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complex를 감추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 옥합을 깨뜨렸다고 했습니다.

막14:3 - 옥합을 깨뜨리고......

무엇을 말합니까? 단순히 나드 향을 주님을 위해 바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께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여인의 complex를 감추고 있던 담을 헐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즉 내 complex를 솔직히 주 앞에 내어 놓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장해제입니다. 나를 포장하고 있던 나의 거짓된 모습을 버리고 내 모습 이대로 나를 주 앞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상처 받은 내가 위로 받고 있는 유일한 것을 깨어 버린 것입니다. complex로 인해 좌절감에 젖어 있던 내가 유일하게 심적으로 보상받으며 살았던 그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개념 하나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그 여인의 행위 즉 옥합을 깨뜨린 것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라 선언한 것입니다.

막14:8 -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요12:7 -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것은 또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옥합을 깨뜨린 것과 예수님의 죽으심이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죽은 시체에 냄새가 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깊은 의미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은 우리가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유함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느끼며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 허물 나아가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complex까지 깨끗케 하기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나를 감추고 있던 벽과 담을 허물고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의 자유함을 위하여 죽으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complex 때문에 계속 힘들어하고 괴로워한다면 돈 때문에 학력 때문에 외모 때문에 집안 환경 때문에 힘들어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래의 삶을 감추기 위해 간직해 왔던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야 말로 예수님의 장례를 가장 잘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세상의 방법대로 위로 받고 보상 받았던 그 유일한 통로를 깨뜨린 마리아야 말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장 값지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요즘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순절에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고통을 받으면 죽으셨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순절에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가리고 있었던 옥합을 깨는 것입니다. 나를 감추기 위해 피난처로 삼았던 그 옥합 나를 잊어버리기 위해 열심히 찾았던 그 옥합 상처 입은 삶을 위로 받고 보상 받기 위해 꼭 움켜쥐었던 그 옥합을 깨는 것입니다.

complex에 눌려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추기 쌓았던 담을 헐고 주님 앞에 그 complex를 갖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솔직한 모습으로 순수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죄 사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당당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벌레만도 못한 죄인들이었습니다.
나도 용납하기 힘든 나의 문제들로 인해
지금도 많이 힘들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런 것들이 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셨는데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주님 돌아 가셨는데
우리는 그런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여
아직도 그런 문제들로 인해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번 사순절 기간에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complex에서 벗어나
당당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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番号 題目 文件 日期 照会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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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2006년 4월 23일 주일] 주께 엎드리는 자 06-04-251643
96  [2006년 4월 16일 주일] 무엇이 부활하는가? 06-04-161623
95  [2006년 4월 9일 주일] 잡히시던 밤의 만찬 06-04-091682
94  [2006년 3월 26일 주일] 하나님의 법을 잊지말라 06-03-261624
93  [2006년 3월 19일 주일] 옥합 깨뜨리기  06-03-191400
92  [2006년 3월 5일 주일] 세월을 아끼십시오 06-03-05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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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2006년 2월 5일 주일] 너무도 약한 존재이기에 06-02-051213
88  [2006년 1월 22일 주일] 충성된 종의 완성 06-01-22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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