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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 19일 주일] 말씀대로 산 것 뿐인데


말씀대로 산 것 뿐인데

행28:11-15



많은 사람들은 일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참 힘들다고 말합니다. 똑같은 노력을 기울여도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이미 증명이 된 문제입니다.

일본에 복음을 증거 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좀 더 자세하게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뿐 아니라 어떤 종교가 그 사회에 있어서 종교화를 뛰어 넘어 문화화 되었을 때는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사회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척 힘이 드는 이유도 그들 사회에서 이슬람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이미 생활 문화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화의 충돌이 너무 크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원래부터 적대시했기 때문에 복음의 증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문화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이미 1549년 8월 15일 예수회 소속의 스페인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르(Francisco de Xavirer 1506-1552)에 의해 복음이 들어 온 땅입니다. 그리고 수 십 년이 지나면서 복음이 매우 빠른 속도로 퍼져 갔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幕府의 將軍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幕府政權을 위협하는 큰 세력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자연히 기독교를 탄압하게 되었고 기독교가 일본 땅에서 영구히 성장하지 못하도록 제도화 하였습니다. 그 제도 중에 하나가 바로 檀家制度입니다.

寬永(칸에이) 12년 1635년에 시행된 檀家制度는 기독교를 겨냥하여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이 단가제도는 모든 백성은 필이 어떤 불교종파에 소속이 되어 그 곳을 통해 출생 혼인 사망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무화 한 제도입니다. 그 제도는 지금껏 이어져 내려와 요즘에도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불교의 사찰에서 관리하는 가족들의 분묘를 갖고 있고 그 가족묘에 들어가는 것이 일본인의 장례문화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기독교를 믿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그 가족의 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문화를 파고들어 가 그 문화의 형태와 반대가 되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독교가 처음 조선 땅에 들어갔을 당시에 한국은 유교의 문화에 있었던 나라였습니다. 그 중 조상에 대한 제사의 문제는 지금도 기독교인들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제사는 이미 한국인에 있어서는 종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문화입니다. 그 문화를 바꾼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종교가 문화화 된 사회에서 복음은 그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시대의 로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을 보면 바울이 그렇게도 원했던 로마에 드디어 도착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롬28:14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로마는 당시 어떤 나라였습니까? 바울이 로마에 도착해서 첫 발을 내 딛던 때 로마는 태양신을 숭배하고 있었고 그 태양이 곧 황제라고 생각했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종교의 형태를 뛰어 넘어 문화로 굳어졌던 때였습니다. 잘 알듯이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이 바로 태양신을 숭배하는 주기를 기초로 만든 달력이고 일요일(Sonday/태양의 날)을 하루 쉬면서 예배하는 것도 로마의 태양신을 숭배하던 종교형태였습니다. 계시록 13장에 보면 모든 국민들이 황제 신을 숭배해야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증표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데 그만큼 황제의 숭배는 로마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생활문화가 되었던 것입니다. 국민들의 출생과 결혼 사망을 관리하는 차원이 아닌 태양신의 신전에서 일일생활까지 관리하는 문화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가 그 지역에 뿌리내려 모든 생활 속에 문화화 된 곳은 복음이 파고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마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로마는 바울이 로마의 땅을 밟은 이후 300년이 지나 기독교가 바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됩니다. 311년 콘스탄틴 클로루스 황제 때 기독교에 대한 관용령이 극적으로 내려졌고 그 뒤 2년 후 313년에는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392년에는 드디어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다른 종교의 예배를 막는 법을 제정하여 기독교의 국교화를 선언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입성한 때가 A.D.61년이니까 정확히 330년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로마가 국교화 되는 데는 역사적으로 콘스탄틴 1세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1세 같은 황제는 황제가 되기 전부터 이미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아버지 콘스탄틴 클로루스가 죽고 난 뒤 6명의 황제의 후보들과 전쟁을 할 때 그는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십자가와 빛을 보여주면서 「여기서 이길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고 말 했을 정도로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던 황제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황제와 같은 높은 신분의 집안에서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생겨났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울이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 골라서 복음을 전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오히려 바울은 신분이 높은 사람뿐 아니라 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구별 없이 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로마시대에는 나라가 안정되고 도시마다 교역이 늘면서 음란과 퇴폐문화가 활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문헌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또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당시의 사회 상황과 고린도서에 나오는 상황들을 종합해 봐도 로마시대에 성적으로 매우 음란한 생활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미 동성애 때문에 교회가 혼란할 정도였는데 그렇다면 다른 것은 말 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회적 풍조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지켜 나간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지키고 자신의 마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 모습의 생활을 해 나갈 때 귀족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결혼시킬 때 자연스럽게 기독교인들을 선호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귀족들이 며느리를 볼 때 순결하고 순수한 기독교인들의 자녀들을 매우 좋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귀족의 집안에 기독교인들이 며느리로 들어가게 되고 그들이 자녀를 낳고 기독교인으로 키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위로부터의 복음의 증거에 대한 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복음화 되어간 것이 더욱 큰 힘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전도지를 돌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성경을 얘기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들이 했던 것은 단지 말씀다로 자신을 지키며 살았던 것 뿐 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서 자신을 지켰던 것이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로마가 복음 앞에서 무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에 힘써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당시 세상 사람들로부터 별명을 몇 가지 얻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새 술에 취한 자>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고 새 술에 취한 자는 제 정신이 아니라는 뜻이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는 그들에게서 뭔지 모르는 힘을 발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뜻을 죽이고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애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터 큰 힘이나 완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더 큰 권세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로 예수 믿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평범한 그들 때문에 로마제국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모든 문화가 300년 만에 바뀌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꿈꾼 사람이 아닙니다. 싸워 쟁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지하에 숨어서라도 말씀을 지키기를 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세상의 가치관대로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복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三國志에 보면 조조(曺操)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신야성에 머물고 있던 유비(劉備)를 공격해 옵니다. 유비는 버텨보지만 워낙에 많은 군사가 공격을 해 오는 터라 신야성을 포기하고는 강릉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러나 너무도 급한 상황이라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도성에 남겨놓고 가게 됩니다.

조조의 군사들이 장판교(長坂橋)에 모여 있을 때 조조는 군사들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장판교 언덕에 올라 장판교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상한 광경이 벌어집니다. 한 장수가 100만 대군 사이를 말을 타고 달리면서 싸움을 하는데 조조의 군사 중에 아무도 그 장수를 막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군사들이 그 장수 앞에서 모두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조조가 부하를 시켜 그 장수가 누구냐고 알아보라 했는데 신하가 알아보니 그는 유비의 동생 같은 신하 曺雲(조자룡)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군사들의 칼을 맞고도 꿋꿋하게 싸우는 그의 모습을 보고 조조는 매우 부러워하며 호랑이 같다고 감탄을 할 정도였습니다.

조운은 신야성에 있는 유비의 아내와 아이 아두를 위해 혼자서 적지인 신야성에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유비의 아내와 아두를 보게 되는데 이미 유비의 아내는 부상을 입어 자신이 조운을 따라 가면 방해가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유비의 아내는 조운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우물에 빠져 자살을 하게 됩니다. 결국 조운은 아두를 허리에 묶고는 갑옷을 그 위에 입고 말을 달리며 적진을 빠져나오던 것이었습니다. 조운의 손에 쥐어진 것은 오직 칼 한 자루. 조조의 군사들은 창과 철퇴(鐵球)까지 휘두르며 조운을 공격했고 조운은 여러 번 칼에 찔려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용맹스럽게 싸우며 적진을 빠져 나옵니다. 100만 대군이 조운 하나를 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빠져 나온 조운은 유비에게 유비의 아기 아두를 건네게 되는데 그 때 유비는 아두를 땅에 내 팽기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녀석 때문에 내 동생 조운을 잃을 뻔하였구나!」

그 말을 들은 조운은 거기에서 다시 한 번 감동하여 유비를 위해 평생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여러분 감동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조운이 들고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칼 한 자루였습니다. 그런데 그 칼 한 자루에 100만 군사가 꼼짝을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도 수많은 칼이 있었지만 그것이 조운의 손에 들려졌을 때 비로소 그 칼은 위력을 발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칼들이 그저 집에 진열이 되어 있다면 그저 궁에서 진열되어져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서는 그 어떤 힘도 발휘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복음은 칼입니다. 그러나 100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 그 칼도 손에 들려지지 않으면 한 갓 쇠붙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칼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칼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정에서만 쓰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만 쓰이고 있습니다. 진열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칼은 그렇게 쓰이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의 칼은 여러분의 손에 들려져 생활 속에서 쓰여 져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100만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큰 능력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전도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재산을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을 지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고 게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 복음이 생활 속에서 쓰여지고 나타날 때 세상을 바꿀 만함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로마는 결코 변할 수 없는 큰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로마는 기독교화 되기 어려운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시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 기독교인들이 말씀대로 하루 하루를 살았더니 300년이 되어 로마는 변하였습니다.

우리가 일본 땅에서 삽니다. 남들은 다 말합니다. 일본은 복음화 되지 않을 것이라고. 기독교인들조차 말합니다. 일본은 복음화 되기 힘들다고....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일본이 로마보다 더 강하지 않습니다. 더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복음화 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일본의 다른 종교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일본의 전통문화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대로 생활하지 못해서 입니다. 우리 손에 복음이 들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이 땅을 변화시키는데 한 몫을 담당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우리에게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복음이 힘없이 갇혀 있지 않게 하시고
그저 장식품으로 남아있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복음이 하루 하루 생활 중에 쓰임받게 하시고
그 말씀대로 살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힘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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