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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21일 주일] 참된 전도자


참된 전도자

롬10:13-15




지난 목요일인 18일은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았던 한 영화가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상영을 시작했던 날입니다. 이른바 <다빈치 코드> 라는 영화입니다. 일본에서는 어제 20일에 개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이유는 바로 이 영화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응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이 영화의 제작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대책회의를 여러 차례 했고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많은 기독교문화의 국가들의 교회에서는 이 영화의 제작을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일본은 기독교의 영향력이 많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하여 별로 큰 반응이 없었지만 기독교문화가 깔려있는 미국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특별히 보수적인 교회들이 이 영화의 제작에 대하여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았던 것은 로마 교황청의 반응 때문도 아니고 구미의 기독교국가의 교회들의 반응 때문도 아닌 바로 한국 기독교의 지나친 반응 때문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기독교계가 하나의 영화로 인해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낼 정도로 매우 큰 반응을 보인 것은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될 만 하였습니다.

실제적으로 지난 18일을 전후해서 한국에서는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450여개의 개봉관에서 상영되는데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라고 하는 한국의 보수적인 교계 단체에서는 450여개의 극장 앞에서 상영금지 시위를 벌일 것을 결정 하였습니다.

단지 하나의 영화 때문에 한국의 기독교계가 왜 이렇게 야단들인가? 한국 기독교계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원래 <다빈치 코드>는 2003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소설책입니다. 댄 브라운(Dan Brawn)이라는 작가의 추리소설인데 2003년에 미국에서 발간 된 이후 지금까지 1000만부 가까이 팔려 메가 베스트 셀러 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했던 책입니다. 약 3억의 미국 국민 중에 5500만명이 이 책을 읽었다 하니 과히 그 책의 위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추리 소설의 내용인 것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루-블 박물관장의 살인 사건을 추적해 나가던 중 다빈치가 그린 그림에서의 코드를 푸는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부인이었으며 예수의 혈통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런 중요한 사실을 교회가 지금까지 은폐해 왔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들이 굉장히 흥미 있게 전개가 되면서 교회의 걱정은 이 소설의 내용을 독자들이 사실로 받아들일 우려가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많은 나라의 보수적인 교회들은 이 소설이 영화화 되는 것을 반대했으며 특히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들은 더욱 심하게 반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한기총은 이 영화가 기독교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다는 이유로 상영 금지되도록 법원에 신청했고 또 한기총 산하의 각 교회에 이 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는 공문을 내려 보냈습니다.

다음은 한기총의 공문내용 중 일부입니다.

<영화 다빈치 코드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부활과 성경진리에 대한 훼손과 모욕 그리고 이로 인하여 초래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환경 조성으로 한국교회는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지극히 천박한 상업적인 영화로 허구를 사실로 착각하게끔 만들어 일반인들은 물론 기독교인들조차 왜곡된 기독교진리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리고는 각 교회가 동참해야 하는 실천 사항으로는 각 지역의 개봉극장 앞에서 관람금지 캠페인을 벌이고 또한 그와 더불어 교회의 전도 집회에 대한 안내지를 극장 앞에서 배포하도록 권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러한 일부 한국교회의 반응에 대해 동참해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것은 옛날 어떤 철학자의 말이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 (Nietzsche Friedrich Wilhelm 1844-1900) 가 한 말 때문입니다. 니체는 우리가 잘 알듯이 무신론자이며 인본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었던 철학자입니다.

니체는 그의 명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말 「신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오늘날에 강요하는 것이 인간의 삶을 파탄으로 이끌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삶을 다시금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그 낡은 가치관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즉 기독교의 신앙으로는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그의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신론자가 된 것과 또 기독교사상을 바꿔야 인간들이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의 주위에 있었던 기독교인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라고 말하면서도 자신들의 삶 속에서 부활의 증거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증거를 보여준다면 자신은 그리스도를 믿겠노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옛날의 우리와 관계없는 독일의 철학자의 말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면 누구나 잘 아는 이어령(李御寧) 이라는 한국의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화여자대학의 교수를 지내셨고 전에 문화부장관도 하셨던 한국의 석학인 그 교수님도 니체와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한 가지 종교를 가져야 한다고 한다면 심정적으로는 기독교를 믿고 싶은데 내가 기독교인이 아닌 것은 기독교인들의 모습 속에서 부활의 종교라고 하는 그 확신과 인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진지한 고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니체는 부활의 종교라고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어령 선생님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날 기독교계는 한 영화 앞에서 이렇게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영화 다빈치 코드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부활과 성경진리에 대한 훼손과 모욕 그리고 이로 인하여 초래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환경 조성으로 한국교회는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라고 말하여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영화 <다빈치 코드>를 봐도 된다 봐서는 안 된다하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부활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부활과 성경진리에 대한 훼손은 누구에게서 나오는 것입니까?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삶 속에서 부활의 증거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입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으로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부활의 확신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이렇게 사회에서 나약하거나 무능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확신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이 있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은 좀 더 담대해 질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과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만 인정하고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보람되고 영향력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회사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로마의 원형경기장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죄인의 신분으로 붙잡혀 끌려 나옵니다. 연약한 여인들과 아이들까지 포함된 죄인들은 이제 곧 죽는다는 것 때문에 떨고 있습니다. 이윽고 경기장의 한 쪽 문이 열리면서 굶긴 사자들이 달려 들어옵니다. 사자를 보고 놀라 무서워 떠는 아이들을 엄마가 품에 안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야 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참으면 우리는 이제 곧 하늘나라에서 다시 기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야. 아파도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곧 밝은 세상이 온단다!」

부활의 신앙과 소망은 우리의 생활 중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말로만 부활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부활의 소망이 우리에게 있다면 삶의 모든 것이 변할 것입니다. 삶의 모든 걱정과 근심이 해결 될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고 세상의 편안한 삶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더 높아지려고 남들을 끌어 내리지 않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있기에 귀한 것과 귀하지 않은 것의 가치관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초대교회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라고 평가하였던 것입니다.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우리는 모두 언젠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삶의 모습을 가만 들여다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이 생활합니다. 영원히 살 것 같이 생활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갖는 대부분의 모든 갈등과 아픔 나아가 고통들은 대체로 삶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삶에 대한 욕심은 집착으로 이어지고 그 집착 때문에 사람들은 더 가지려 하고 더 높아지려 하고 더 사랑 받으려 하고 그래서 더 미워하고 더 싸웁니다.

제가 아는 어느 가난했던 안수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집은 90이 된 어머님의 병환 문제로 심하게 어머님과 싸워 마음 아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90이 된 어머님께서 다리가 부러지셔서 수술을 해야 했는데 인공뼈를 바꾸는데 10년을 쓸 수 있는 뼈와 20년 이상을 쓸 수 있는 뼈가 있는데 가격차이가 다섯 배 정도 났다고 합니다. 돈의 여유가 없던 그 댁은 결국 10년을 쓸 수 있는 인공뼈로 수술 받기로 결정을 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는 어머님께서 섭섭해서 아들과 싸움을 하셨던 것입니다. 베게를 집어 던지면서 「빨리 죽으라고 그러는 것이냐!」고 하시더랍니다. 그 어머님은 교회의 권사님이셨는데 삶에 대한 애착이 참 강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돈이 있으면 좋은 것으로 해 드리고 싶은 것이 자녀의 도리이고 그 집사님도 경제적인 여유만 있었다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깊이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리가 부러진 당사자라고 한다면 자녀에게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머님께 10년간 사용할 수 있는 인공뼈로 수술을 받게 할 것인지 아니면 20년 이상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수술을 받게 할 것인지 어느 쪽이 옳은 것인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또 하나의 이야기 입니다.

한국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있습니다. 물론 이 제일 크다는 것은 등록신도의 수를 말하고 예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올해 70세로 법적으로 은퇴를 해야 하는데 시무 연장을 위하여 교회의 규례와 교단의 헌법을 고쳐서 75세까지 목회를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지금 목회를 계속 하고 계십니다.

저는 위에서 말씀드린 90세 권사님의 마음과 75세까지 시무연장을 하면서까지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의 얘기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이 없으면 삶에 대한 집착이 생깁니다. 삶에 대한 집착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지 못하는데서 나옵니다. 죽음 후의 세계를 기대하지 못하는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빈치 코드>가 상영되는 극장 앞에서 영화를 보지 말라고 시위를 하는 것이 기독교를 알리고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부활의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우리가 믿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보고 예수를 믿기도 하고 믿음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져보려고 교회에 왔다가도 교회를 계속 다닐 것인지 아니면 안 다닐 것인지는 사람을 보고 결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믿음을 결정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목사의 설교를 듣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보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한대로 목사 스스로가 살고 있는가 아닌가를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사람을 보고 예수를 믿습니다.

좀 죄송하기는 하지만 우리교회의 어느 집사님의 얘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 집사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은 믿음이 없는 「날날이」 집사라고 말씀하면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늘 제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 때문에 우리교회에 나오는 새신자들이 꽤 있습니다. 다른 교회를 다니다가 우리 교회에 오시는 것이 아니고 새로 예수를 믿겠다고 오시는 분들입니다. 새로 오시는 분들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게 집사님께서 회사에서 생활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아서 그 분 같으면 예수 믿겠다고 생각하여 호감을 갖고 오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 자리에 앉아 계시지만 이 얘기는 본인도 잘 모르실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본래의 모습이 있습니다. 본래의 맛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세상의 상식보다 더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의 맛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그 맛을 잃어버릴 때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외면당하고 밟히고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제가 지난 주중에 봤던 인터넷 기독교 신문에서는 개봉극장 앞에서 <다빈치 코드>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이는 어느 목사님의 사진이 큼직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는 이런 기사가 같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의 목사님이 대법원에서 공금횡령과 여자문제로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자신이 언제 구속될지 모르니 후임자를 결정해야 한다고 하여 당회를 소집하여 자신의 아들을 후임자로 정했다는 기사였습니다. 대형교회의 또 하나의 세습이 결정되는 순간입니다.

욕심입니다. 집착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죽는다는 것과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선다는 부활의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헌법을 고쳐서까지 목사은퇴의 정년을 늘려서 목회를 하는 것과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나름대로 핑계는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지 않으면 교회가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신다는 평범한 말씀조차 믿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불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인구는 이미 감소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빈치 코드>같은 문화의 도전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소금의 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신앙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진리를 세상의 상식보다 더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욕심을 버리고 남을 배려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고 깨끗하고 겸손하게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습이 생활 곳곳에서 실천이 될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의 신앙이 없는 오늘날의 교회에서 동경교회 교인되시는 여러분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로 마음먹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성경의 진리를 세상의 상식보다 더 믿고 따르는
신앙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 마음으로 살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시고
그런 삶을 살므로 참된 전도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동경교회 교인들 때문에
동경이 변하고
일본의 한인사회가 변하고
나아가 일본이 뱐하기를 원합니다.
남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갖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겸손과 온화한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사회가 변화될 줄 믿습니다.
주님 누군가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면
우리 동경교회가 그 일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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