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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5일 주일] 속건제 책임을 묻는 제사


속건제 책임을 묻는 제사

레 6:1-7



미국의 작가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 <다빈치 코드>는 2006년 올 한 해 온 지구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그의 소설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론 하워드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꽤 많은 히트를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이 된 것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마도 종교계 특히 기독교와 카톨릭에서의 반발 때문에 그 자체가 뉴스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그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다빈치 코드>를 보면 그 작품 안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한 광적인 신자(수도원 수사)가 나옵니다. 그는 그 작품 속에서 한 사람도 아닌 여러 사람을 죽이는데 그는 자신의 행동이 신앙을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나서는 꼭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죽인 자신의 죄를 정화하는 의식을 갖습니다. 예수님이 맞았던 것과 같은 쇠꼬챙이가 있는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정신없이 때립니다.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죄를 정화시켜 나갑니다. 사람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해결 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어느 청년이 그 장면을 보고는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런 극단적인 신자들이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저럴 수가 있습니까?」
「저런 행동이 무슨 신앙인 이란 말입니까?」
「소설이나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닙니까?」
아마 다빈치 코드에 대한 기독교의 반발은 예수가 결혼을 했다는 것과 그 자손이 오늘날까지 있다는 설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작품 속에 이렇게 이상한 신앙인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소설을 읽고 또 영화를 보면서 그 광신적인 범인에 대해서 그렇게 놀랄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주변에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사이비 이단 종교가 실제로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옴-진리교 같은 종교집단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본에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제가 그런 장면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은 이유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과 별 반 다르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다 그 살인범같이 못 된 사람들이란 말이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그 범인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살인죄를 범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회개하며 죄를 해결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 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해결을 하지 않은 채 그저 하나님 앞에서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맙니다. 그리고는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합니다. 생각보다 의외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신앙생활에 익숙한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 소설 속의 범인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교회에서 여름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 당시 여름 수련회를 가면 항상 마지막 날에는 캠프 화이어 라는 프로그램을 하였습니다. 그 때 선생님들은 우리들에게 자신의 죄를 종이에 적으라고 하였습니다. 친구에게 잘못 한 것 부모님께 잘 못한 것 많은 것들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는 그 죄를 쓴 종이를 모닥불에 태웠습니다. 가슴이 후련해졌습니다. 저는 그 의식을 통해 죄의 문제가 해결 된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다음의 행동에 대하여 가르쳐 준 분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청소년 때의 수련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 속에도 그런 생각들이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참회의 순서를 가집니다. 한 주간 동안의 자신이 지은 죄를 하나님께 고하며 참회하는 순서입니다. 저도 우리 교회에서 예배 순서를 정할 때 그 참회의 시간을 넣을까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로서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참회의 시간을 가져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예배 중에 가지면 그런 시간을 갖지 않을 때 보다는 더 죄에 대하여 민감해져서 조심하여 분명 죄를 덜 지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회의 시간은 분명 좋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참회로만 끝이 난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죄라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사죄하여 해결한다면 그것은 진정 죄의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시간 중에 참회의 시간을 정말 가져야 된다면 사죄의 선포 이후에 교인들에게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라고 말해야 합니다.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5대 제사의 마지막 다섯 번째의 제사를 배웁니다. 속건제사라는 것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죄 무의식적으로 지은 죄를 해결하는 제사를 말합니다. 즉 하루하루 일상생활 중에 나도 모르게 짓는 모든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제사의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우리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밀접하게 필요한 제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제사에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이 전 네 가지의 제사 즉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에서는 나오지 않는 유일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이 있으면 피해를 준 것 보다 더욱 많은 것으로 보상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레6:2-5
②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 곧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③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에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④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빼앗은 것이나 늑봉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얻은 유실물이나
⑤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 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속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책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속건제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제물이 무엇이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책임이 될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수양을 바쳐야하지만 더 중요한 제물은 바로 책임성인 것입니다. 책임을 지는 행동을 할 때 그 때 우리가 짓는 일상적인 죄가 완전하게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 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성경은 그가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설명하는데 그가 당시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세금을 거두면서 남의 것을 많이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다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 앞에서 고백을 합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의 믿음이 정확했습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르칩니다. 삭개오는 그것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눅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무엇을 말합니까? 선행을 베풀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재물을 포기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잘못된 점을 해결할 때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면 다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 우리의 죄로 인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가서 그 잘못된 죄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그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결과 회개는 많이 하고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오래 하는데 신앙인의 윤리와 도덕성은 세상이 우려할 만큼 형편없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 레위기의 제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제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찾고 있습니다. 속건제는 케케묵은 옛날의 제사가 아닙니다. 그 정신은 오늘도 지켜야 하는 귀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속건제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최근에 남의 마음에 아픔을 준 적은 없으십니까? 남의 인생을 가로 막고 있는 일은 없으십니까? 남의 것을 가져다가 아직 돌려주지 못한 것은 혹 없으십니까?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은 없습니까? 남의 것을 가로챈 것은 없습니까?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 죄를 해결하려고 나온다 해도 그리고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도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죄의 해결을 위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제물로 받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속건제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동경교회 교인들입니다. 동경교회는 일본 땅에 세워진 첫 한인교회입니다. 그래서 많이 알려진 교회이고 그래서 좋던 싫던 한인교회의 대표성을 갖는 교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동경교회의 그런 역할 때문에 우리교회를 어머니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머니교회라고만 부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교회를 어머니교회라고 부르면서 그 어머니교회에 다니는 교인들도 어머니교회 교인 같은 행동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매우 부담이 되는 점이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행동은 너무 중요합니다.

저는 동경교회 교인 때문에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얘기도 참 많이 들었지만 죄송하게도 그 반대의 얘기는 더 많이 듣고 있습니다.

「저 사람도 동경교회 교인이래!」 라는.....

좋던 싫던 여러분들은 동경교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러분들의 말과 행동 때문에 여러분들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이 평가를 받게 됩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입니까? 그렇다면 속건제를 바르게 드려야 합니다. 속건제는 무의식중에 지은 죄를 해결하는 제사입니다. 그러기에 최선을 다 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향기가 되어 사랑을 증거 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하지만 만일 일상생활 중에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있다면 하나님하고만 해결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행동으로 죄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기부츠(집단농장) 초등학교에서 동물을 길렀는데 그 중에 당나귀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나귀는 몸체가 작기에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동물 당나귀 뿐 아니라 사람 당나귀도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 당나귀란 정신지체 장애를 갖고 있는 한 학생의 별명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학생들의 사랑을 받던 당나귀가 없어졌습니다. 학교의 학생들 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까지 다 동원되어서 당나귀를 찾았으나 허사였기에 당나귀를 사랑했던 모든 학생들은 슬픔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당나귀 별명을 가진 정신지체 어린이가 아이들이 너무 슬퍼하는 것을 보고는 용감하게 나서서 자기가 잃어버린 당나귀를 찾아오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모두 비웃었습니다. 어떻게 정신지체장애아이가 당나귀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고 비웃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얼마 뒤에 그 정신지체아는 당나귀를 찾아 끌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똑똑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동원돼 찾아도 찾지 못했던 그 당나귀를 정신지체아 혼자 찾아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워서 선생님이 그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너는 당나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니?」
「선생님 제가 당나귀 아닙니까?」
「아니 네가 당나귀 인 것은 알지만 그것은 별명이잖니? 내 질문은 네가 어떻게 진짜 당나귀가 있는 곳을 알았느냐 하는 것이야!」
「그야 쉽지요. 내가 당나귀이니까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가생각해 보니 꼭 한 군데가 떠오르더라구요. 그래서 거기를 갔더니 당나귀가 있길래 데리고 왔어요!」

이 이야기는 심리학책에 나오는 얘기인데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공감적 이해>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속은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이해를 통해서 서로를 알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공감적 이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감적 이해는 무엇입니까? 남들이 우리의 속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때야 한다는 이해는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이해는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남을 존중합니까? 남을 사랑합니까? 남을 위로합니까? 생명을 소중히 여깁니까? 내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 자녀 대하듯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몰라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감적 이해입니다. 그들의 그 공감적 이해가 맞을 때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기독교를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공감적 이해가 빗나가게 될 때 그들은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의 문이 우리로 인해 닫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속건제의 제물은 책임성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입니다. 하나님과만의 관계에서 죄를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그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 됨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모든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지금껏 이웃과의 관계를 너무 소홀히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것들을 하나님께 갖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 하나님이 나타날진대
내가 져야 할 책임을 반드시 지고 이 땅에서 생활할 수 있는
그런 용기와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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