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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3일 주일] 질그릇 다시 보기


질그릇 다시 보기

딤후 2:20-21



지난 하와이에 한 달 동안 가 있을 때 하와이의 TV방송을 보며 놀란 점과 안타까운 점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놀란 점은 TV방송에 기독교 방송이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네다섯 개 방송에서 각 교회의 예배의 실황과 신앙 대담 찬양들 그리고 신앙인들의 토크쇼들이 하루 종일 계속 방송이 되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기독교 국가이다 보니 이렇게 많은 기독교 방송들이 있구나? 하며 부러운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워낙에 많은 인종들이 함께 사는 사회이다 보니 각 인종들의 기독교 방송이 하나씩 있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미국 백인들의 교회는 물론 한국교회의 방송도 있고 하와이 원주민의 교회 방송 사모아 인들의 방송 그리고 필리핀이나 베트남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도 방송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많은 기독교 방송을 보며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독교 방송을 보며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방송으로 나오는 많은 교회의 예배들이 무슨 은사집회를 하듯 기복적인 신앙을 위해 시끄럽게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미국 백인들의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이 두드러졌습니다.

미국의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을 갖고 있는 교회들은 은사 집회 같은 것을 많이 하고 또 그런 신앙을 추구합니다. 대체로 말은 은사집회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복을 갈구하는 그런 집회들입니다. 사업이 잘 되게 하기 위하여 이이들이 좋은 대학을 들어 가에 하기 위하여 집안이 편안하게 되게 하기 위하여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모여 든 수많은 신도들이 목사의 기도를 받고 안수를 받고 옷을 만지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도 TV를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하와이의 기독교방송을 보다가 그 방송을 오래도록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근본주의 신앙은 미국의 교회 뿐 아니라 한인교회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방송에서 기독교 방송에서 일반화 되지 않았을 뿐이지 공공연하게 교회나 기도원에서 행해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꼭 해마다 연초가 되면 열리는 신년 축복 대 성회를 예를 들지 않더라도 많은 교회들의 부흥회 모습을 보면 부흥이라는 이름 하에 기복적인 신앙의 형태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많은 교인들은 금식을 하기도 하고 많은 헌금을 바치며 크게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그런 집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신학교 동기 목사님께서는 한국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교회의 기도원 원장입니다. 그 기도원도 한국에서는 크기나 규모로는 일 이 위 쯤 하는 꽤 큰 기도원입니다. 얘기를 들어 보니 한 해의 운영비가 엄청나게 들어가는 규모였습니다. 제가 그 운영비가 교회에서 매 달 나오는가 하고 물었더니 자기네들은 자체 운영이 된다고 합니다. 그 큰 기도원이 어떻게 자체 운영이 되느냐고 물으니 연초에 한 달간 신년축복 성회를 하는데 그 때 헌금으로 일 년 치 예산이 다 나온다는 것입니다. 축복을 바라며 편안한 삶을 위해 한 해의 기원을 하는 교인들의 간절한 마음의 모습입니다.

대체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기독교의 맹신적이고도 광신적인 모습을 지적합니다. 한국인의 경우 부부 중에 한 쪽만이 신앙생활을 하경우가 많은데 특별히 아내가 먼저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아내들은 남편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유는 십일조 등 헌금을 많이 하는 것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교회에 다니지 않는 남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내의 신앙에 동조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헌금 때문이 아니라 아내의 광적인 신앙이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아내가 광신적인 신앙을 갖고 있을 때 믿지 않는 남편은 더욱 신앙을 갖기 힘들게 되는 것이고 심하면 교회를 다니지 못하게 막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남편을 기독교를 핍박하는 마귀나 사탄쯤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광적이고 맹신적인 신앙을 가질수록 그 추구하는 것은 기복주의적인 신앙입니다. 돈을 많이 벌기 원하고 아이가 좋은 학교에 합격하기를 원하고 병이 들지 않기를 기원하고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고 가정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그 축복을 얻기 위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것이 어느 덧 우리의 믿음이 축복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한 사람이 생각납니다.

그는 헨리 나웬 (1932-1996) 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193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예수회 소속의 카톨릭 신부가 된 사람인데 1971년부터 10년간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쳤던 교수입니다. 그는 10년의 교수생활을 접고 페루로 가서 빈민들과 함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생활을 계속 하다가 그는 자신이 자신의 그런 행동이 성숙하지 못한 지적 교만이라는 생각에 많은 고민을 하다가 다시 하바드 대학 신학부 교수로 부임 해 학생들에게 심리학과 그리스도의 영성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계속되는 축복된 삶에 대한 도전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결국 1985년 카나다로 가서 정신치제아이들의 공동체인 라르슈 공동체에서 1996년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할 때 까지 10년 간 정신지체 아이들의 좋은 벗으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저는 지금 교수직을 버리고 봉사의 삶을 살아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두 가지 신앙형태의 비교입니다.

한 쪽은 예일대학의 교수직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예일 대학의 교수직과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버리면서 자신은 가장 축복된 삶을 누리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가진 자의 오만입니까? 누린 자의 자만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왜 이런 신앙의 차이가 생기는지 아십니까? 똑같이 예수를 믿는데 왜 이런 복에 대한 차이가 생기는지 아십니까? 아니 쉽게 설명을 드리자면 왜 기독교의 목사가 자기의 자녀들에게 교회의 예배를 중계하는 방송을 보지 못하게 했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성경을 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생겨납니다.

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이 말씀에 대해서 보는 시각이 다르면 다른 신앙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금그릇이나 은그릇이 될 수도 있고 나무그릇 질그릇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늘 심리적으로 자신에 대하여 상대적인 평가를 하기 때문에 자신을 늘 질그릇으로 생각합니다. 남들이 존경하는 대학교 교수님은 세계적인 학자가 되지 못한 것에 자신을 질그릇이라 생각할 수 있고 평생 먹고 살 만큼 돈을 많이 번 중소기업 사장님은 대기업 회장님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은 질그릇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질그릇으로 생각할 때 우리의 관심은 항상 은그릇 금그릇 입니다. 오늘 성경의 말씀을 볼 때도 그 그릇에 담겨지게 될 내용보다는 은그릇 금그릇이라는 그릇의 재질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고 축복의 개념도 질그릇이 금그릇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어 축복을 받으면 질그릇 나무그릇이던 내가 금그릇이나 은그릇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의 개념을 갖고 있으면 기복주의적인 신앙이 생기는 것입니다. 질그릇을 벗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질그릇과 나무그릇은 축복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금을 생각하고 은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축복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큰 축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진정한 축복은 그릇의 재질이 아닙니다. 은그릇 금그릇이 아닙니다. 축복은 그릇 속에 담기게 될 보물을 말합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음식보다 그릇이 더 좋다는 우리의 그릇에 대한 선입견 때문입니다.

꼭 일본이 아니더라도 요즘 식당들은 그릇이 참 좋습니다. 좋은 그릇으로 인해 식당의 격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그릇이 좋으면 웬만해서는 그 속에 담겨 져 있는 음식보다 그릇의 가치가 더욱 큽니다. 예를 들면 금그릇에 음식을 담았다고 한다면 그 음식의 가치가 어디 금만 하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선입견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축복은 먹어 없어지는 음식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가 담고 있는 축복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축복이요 우리는 그의 상속자라는 축복이고 영원히 살게 된다는 영생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고후4:7의 말씀과 같이 이 땅의 사는 동안 삶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축복을 말합니다. 참으로 엄청나게 귀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축복이 어디 먹으면 없어지는 음식과 같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담아 주시는 그 축복을 축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릇에 더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나도 금그릇 은그릇으로 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더 큰 축복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릇에 뭐 배급 주듯이 담아주지 마시고 그릇이나 바꿔주시죠!」 라는 생각을 더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평등한 분으로 알고 있는데 현실은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많아 편안하게 사는 사람 가난하여 구차하게 사는 사람 높은 권세로 힘을 갖고 있는 사람 힘없이 남이 시키는 대로 일 해야 하는 사람......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상을 창조하시지는 않았을 텐데 인간들이 너무 악해서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나?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 나무그릇이 이미 있음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평등하지 못한 하나님 때문에 불만을 갖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롬 9:20-21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저는 그 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평등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매우 일방적이시라는 것을. 그러나 나중에 깨달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평등하신 분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정확하게 평등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돈의 가치로 환산될 수 없겠지만 우리는 미련하고 또 제일 관심이 많은 것이 돈이라서 돈으로 계산해야만 제일 빠르게 이해를 하기 때문에 돈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세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10억 엔이 있고 한 사람은 한 달 한 달 월급으로 생활하고 한 사람은 이 것 저것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1억 엔 정도 빚이 있다고 가정해 보면 분명 평등하지는 않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각각 그 세 사람에게 5천억 엔씩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 이제 생각해 보면 평등합니까? 평등하지 못한 것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다 미련하고 돈에 관심이 많아 예수님도 축복의 개념에 대하여 돈으로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달란트 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배웠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값이고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데나리온은 만 엔 정도이고 한 달란트는 5천만 엔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마18:23에 보면 예수님의 재미있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어느 임금님이 일 만 달란트 빚 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었더니 그가 집에 가는 길에 일백 데나리온 빚 진 자를 잡아 그 돈을 갚으라고 목을 졸랐다는 내용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받은 은혜의 양은 5천 억 엔 인데 우리는 그 기쁨을 모르고 100만 엔 때문에 울고 웃고 한다는 말입니다. 오천 억 엔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무한대의 가치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돈 푼이나 있다고 우쭐할 것 없고 돈 없다고 기죽을 것 없습니다. 그것은 참 우스운 것입니다. 권세나 있다고 어깨에 힘을 주고 힘없다고 서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물을 담겨 주신 하나님을 또 다시 가슴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질그릇 같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보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돈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돈이 없으면 축복을 받지 못했다 생각합니다.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사업이 안 되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게 살게 해 달라고 신앙생활 합니다. 건강을 잃으면 벌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거리가 없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때를 씁니다. 그래야 예수 믿는 사람의 체면이 선 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도 다 좋지만 그래서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장 귀한 보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보물의 가치를 정말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작은 것들을 구하기 위해 신앙의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더 감사하고 더 드리기를 원하는 생활로 바뀔 것입니다.

그 보물의 가치를 깨닫고 살았던 한 사람이 지은 시 한편을 여러분들께 소개 해 드립니다.

-우찌무라 칸조 / 예수를 생각하고-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나의 가난함도 슬프지 않고
남의 부유함도 부럽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오직 감사한 마음이 넘칠 따름이라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몸의 환란도 괴롭지 않고
그 행복도 사모하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오직 평강과 만족만 있을 따름이라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일의 실패에 실망하지 않고
그 성공에 뛰며 기뻐하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영원한 승리자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주신 그 큰 보물을 담아 삶의 모든 문제를 풀 뿐 아니라 영생을 맛보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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