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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19일 주일]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요6:52-59



저는 지난 10월에 장로님 두 분과 함께 중국의 심양(瀋陽)을 다녀왔습니다. 우리 동경교회의 창립100주년 기념으로 선교사업을 위해 중국의 조선족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방문했던 것입니다.

심양의 땅을 거닐면서 저는 역사를 생각하였습니다. 심양은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깊은 역사적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조선 인조(仁祖) 14년 그러니까 1636년 그 해 12월에 중국의 청나라는 군신관계를 거부한 조선에 20만 대군을 파병하여 조선을 멸망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다급한 인조는 서울의 남쪽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도피하여 적에게 대항하다가 결국 45일 만에 항복을 하고 맙니다. 식량부족과 추위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결정적으로는 강화도에 도망가 있던 왕자들이 적에게 잡혀 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입니다.

중국의 청나라는 승리의 대가로 조선과의 군신관계를 맺었고 수 만 명이나 되는 부녀자를 포로를 잡아갔습니다. 그 가운데는 인조임금의 첫 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나중에 효종(孝宗)이 되는 둘째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있었습니다. 이 두 왕자와 수 만 명의 부녀자가 끌려 간 곳이 바로 심양이었습니다.

청나라는 포로를 잡아간 지 8년만인 1644년 포로들을 풀어주게 됩니다. 포로들은 오랜 고생 끝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앞세워 다시금 꿈에 그리던 조선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같은 남자들은 환영받았을지 몰라도 많은 여인들은 새로운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향에서 자신들을 환영해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환영이 아니라 아예 받아주질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녀자들이 8년간 부정한 생활을 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청나라 오랑캐들과 피가 섞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환향여(還鄕女)」라는 말을 아십니까?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인들」을 말하는 이 단어는 병자호란 때 생기게 되는데 피가 섞인 사람을 의미하게 되면서 지금도 좋지 않게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순결을 잃었다고 하여 「환향년이라 손가락질 당하며 고향에 들어가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임금은 한양의 서북쪽 개천에서 몸을 씻고 입성하면 순결의 문제가 구제된다고 특명을 내렸습니다. 그 개천이 바로 홍제천(弘濟川)인데 그 이름 자체가 」널리 구제하는 개천「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인들이 자살을 하고 살아남은 이들도 슬픔의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그 얼마나 억울하고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억울함과 괴로움은 그 옛날 조선 땅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같은 유대인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같이 앉아 있는 것조차도 죄라고 말할 정도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북방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북쪽의 사마리아 사람들과 그 위의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특히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최북단 지역으로 오랜 기간 북방의 이방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많이 받아 와서 어쩌면 이스라엘에 속해있기 보다는 이방 나라에 속해 있던 시간이 더 길었던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사람들과 피가 섞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쪽의 유대인들이 북방의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람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바로 피가 섞여서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잃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감정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북쪽의 사람들이 순수함을 잃었다고 생각하기까지는 역사적으로 크게 세 번의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의 사건은 가나안 정복 후에 일어납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을 지파별로 나눌 때 북쪽의 갈릴리 지역은 아셀 스블론 납달리 지파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북방의 사람들을 몰아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이방사람의 피가 섞였다고 보는 첫 번째 사건인 것입니다.

삿1:30-33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두 번째의 사건은 솔로몬 왕 때에 일어납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 왕 때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그 때 솔로몬은 북방의 두로왕 히람의 많은 도움을 받게 됩니다. 백향목과 잦나무 그리고 많은 금을 건축 자재로 두로 왕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20년 만에 성전건축이 끝난 후 두로 왕에게 북방 갈릴리의 성읍 20개를 선물로 주게 됩니다. 이것이 이방민족과 피가 섞이는 두 번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왕상 9:10-11
솔로몬이 두 집 곧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이십년 만에 건축하기를 마치고 갈릴리 땅의 성읍 이십을 히람에게 주었으니 이는 두로 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그 온갖 소원대로 백향목과 잣나무와 금을 지공하였음이라

세 번째는 이스라엘이 남 북으로 갈라졌을 때 북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북방나라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는데 200년 동안 북방 나라에게 시달리다가 결국 악명 높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앗수르의 지배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피가 섞이는 세 번째 사건인 것입니다.

이런 저런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 특별히 남쪽의 그 잘난 유대지파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때는 북쪽의 사람들은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그런 북방 사람과 함께 앉아 식사조차 하면 안 된다는 아주 못 된 율법까지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갈릴리에서 나온다는 말에 대하여 「갈릴리에서 뭐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면서 북쪽지역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참 이상하십니다. 같은 민족으로부터도 인간 취급 받지 못하는 그런 갈릴리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12명 중에 11명을 뽑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그 잘난 남쪽의 유대 땅에서 뽑게 되는데 그가 바로 유다입니다. 그는 우리가 「가룟유다」라고 부르는 제자인데 「가룟」이라는 말은 지명입니다. 그것은 유대 땅에 있었던 「이스가리옷」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스가리옷 사람 유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남쪽 출신인 정통 유대인인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게 되고 인간 취급 받지 못한 11제자는 순교를 하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천대받던 갈릴리 11제자는 한 때는 예수로 인해 성공해 보겠다는 마음도 있었고 또 잠시 예수님을 부인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때도 있었지만 결국 생명을 다 하기까지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생명을 다 하기까지 예수를 위해 죽겠다는 각오로 일생을 살다 간 진정한 용기를 소유한 제자들은 바로 갈릴리의 청년들이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이 청년들의 그 믿음과 그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들은 피가 많이 섞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민족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육도 받지 못했고 따라서 돈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위대한 삶을 살게 됩니다. 역사를 바꾸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기 전날 밤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셨습니다. 바로 최후의 만찬입니다. 예수님은 식사 후에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예수님께서 주신 피는 갈릴리 청년들의 몸에 흘렀던 그 피와는 다른 피였습니다. 그 피 안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피를 마신 제자들은 그 후에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마음속에 들어오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들 안에 있던 미움이 용서가 되고 분노가 사랑으로 변합니다. 의심의 마음이 믿음으로 되고 돈과 권세의 자리를 사랑하던 마음이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창피를 준 바울을 용서합니다. 성격 같아서는 말고의 귀를 떨어뜨린 것 같이 참지 못하고 칼로 바울의 귀를 떨어뜨려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베드로는 그런 바울을 용서합니다.

도마는 의심이 많았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노라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제자들은 서로 자주 싸웠습니다. 그 이유는 누가 더 높으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이신 예수님 앞에서 추한 싸움을 하였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노골적으로 높은 자리를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제자들이 누구보다 먼저 순교의 자리로 내려갑니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더 낮은 자리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들은 어디에서 이런 힘을 얻었습니까?

주께서 흘리신 그 피는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줍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감사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평안을 누릴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나의 삶을 볼 때 가정을 볼 때 아이들을 볼 때 직장을 볼 때 사업을 볼 때 여러분 마음이 늘 평안하십니까? 항상 기쁘십니까? 모든 것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됩니까? 부족한 것이 없으십니까? 모든 것이 다 감사합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 고달프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정말 삶이 많이 고달프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내 속에 원죄의 피가 섞여 흐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제사에 대하여 자세히 배웠습니다. 그 중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제물의 피를 다 쏟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섞여 흐르고 있는 원죄의 피를 다 쏟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러운 피를 다 쏟은 그 몸 안에 그리스도의 새 피를 넣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능력 있는 새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 가운데 들어오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감사절을 맞이하여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식이 늘 반복되는 하나의 의식이 되지 않고 진정으로 우리들에게 새 삶을 주는 참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는 예수님의 보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감사절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무엇을 감사하십니까?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피 흘리셨다는 그 사실보다 더 감사한 것은 없습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안에 흐르는 원죄의 그 피를 쏟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피로 채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힘들고 괴로운 삶의 모든 문제에 승리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항상 기쁨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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