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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4일 주일] 한 문둥병자가

한 문둥병자가

마8:1-4




얼마 전인 지난 10월 12일은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신임총장의 취임식이 있었던 날입니다. 그런데 하버드 대학의 신임총장의 취임식이 세인들의 관심을 끈 것은 하버드 대학 371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성인 길핀 파우스트 박사가 총장으로 취임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대학이 371년의 자존심을 버리고 여성을, 그것도 하버드 대학의 졸업생도 아닌 길핀 박사를 총장으로 선임한 이유에 대하여 하버드 대학의 이사회는 “그가 가장 개혁적인 인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라고 밝혔습니다.

길핀 파우스트 박사는 취임식에서 하버드의 개혁을 위해 아주 중요한 몇 가지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하버드의 교육을 분석하면서 최근의 하버드 대학의 교육을 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버드 대학에는 세계 최고의 지식인을 교육시키는 탁월함이 있었지만 ‘혼’이 빠진 교육을 해왔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것이 세계 지성계의 천박함을 야기 시켰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교육이란 학생을 졸업시킬 때까지 어떤 기능을 갖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능을 갖고 있는 사람을 진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의 기능이란 수 천 년의 인류의 문화유산을 정리하고 미래를 위해 지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녀가 말 한 몇 가지의 중요한 것들을 정리해 보면 결국 하버드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개혁을 위해 하버드의 이사회는 길핀 박사를 선임했는데 길핀 박사는 개혁을 위해 본질을 찾겠다고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개혁은 잃어버린 본질을 찾는 것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고 분주하게 살기 때문에 하루하루 이 날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인지 잘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 지난 주간이 어떤 주간인지 아십니까? 지난 주간은 바로 종교개혁 기념 주간이었습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종교개혁을 기념하면서 그 의미를 찾는 한 주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기념주간을 보내면서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다시 찾아야 하는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산상수훈을 가르치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으로 공생애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어려움이 있는 사람 중에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이야기가 가장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문둥병은 지금은 그 병 명 조차 너무 혐오스러워 국제적으로 이미 한센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설교시간에 문둥병을 한센 병이라 하겠습니다.

한센 병은 고대사회에서는 인간이 걸릴 수 있는 질병 중 가장 무서운 질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병은 최초에는 몸에 작은 반점이 생기다가 그것이 썩으면서 더러운 고름이 생기고, 얼마 안 되어 눈썹이 빠지며 눈의 모양이 바뀌어 노려보는 것 같이 되며, 성대는 거칠게 떨리며 소리도 거칠고 호흡도 씩씩거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먼저 손과 발이 오그라들며 썩고 떨어져나가며 서서히 그 썩는 부위가 온 몸으로 확대됩니다. 이런 종류의 한센 병은 병의 종류에 따라 그 사는 기한이 9년에서 길게는 20-30년 까지도 가는데 최후에는 뇌에 침범해서 정신적인 쇠퇴와 혼수상태가 되며 결국 비참하게 죽게 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들은 한센 병만큼 여러 해 동안 인간을 무서운 파멸로 이끄는 질병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병의 특징 때문에 고대 사회에서는 한센 병 환자를 살아 있는 시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도 한센 병은 접촉이 금지되어 있는 병이었습니다. 한센 병에 걸리게 되면 그는 인간 사회에서 추방되었으며 그를 만진다거나 접근한다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었습니다. 한마디로 한센 병은 부정한 병이며 또 부정한 사람들이 걸리는 병으로 인식되어서 그를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레13:45-46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

이런 인식은 예수님 시대를 지나, 중세의 교회에까지 오래도록 이어져서 한센 병 환자는 단순한 피부병 환자가 아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벌을 받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왔고 절대 일반사람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중세에는 한센 병에 걸리면 교회의 사제는 법의를 입고 십자가를 들고 그 한센 병 환자를 교회로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장례식 문을 낭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한센 병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과 교회의 전통을 볼 때 한센 병 환자는 단순히 고통을 받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으로서는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즉 희망도 없고 삶의 의미도 없는, 남에게 피해만주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있어서는 안 되고 도리어 없어짐으로 도움이 되는 그런 존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빠진다 해도 희망이 있으면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자신의 의지가 강하면 희망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이 없으면 죽도록 힘써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일하여 돈을 벌수도 있는 것이고, 아무리 몹쓸 병에 걸려도 희망을 갖고 노력하면 고침을 받을 수도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한센 병은 차원이 다릅니다. 아무리 자신이 희망을 가져도, 자신이 노력을 하려 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회가 그런 희망을 아예 갖지 못하게 합니다. 사회가 그를 버립니다. 사람들이 그를 다시 죽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살 수가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섞여서는 절대로 살 수 없는 존재, 사람들 사이로는 다시 들어갈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한센 병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한센 병 환자가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실 잘 모릅니다. 그들이 우리 시대에서 얼마나 큰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간접적으로라도 느껴볼 수 있도록 우리 시대의 한센 병 환자 한 분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명남이라는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1947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보통 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하게 잘 자라다가 초등학교 4학년인 13살 때에 한센 병에 걸리게 되어 그의 일생이 완전히 변하는 매우 안타까운 삶을 살게 된 분입니다. 그 뒤 동네에서 쫓겨나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집의 뒷산에 움막을 짓고 혼자 살아가게 됩니다.

그 후 소록도에 들어가 죽을 날만을 기다리다가 그곳에서 시각장애인 장로님을 한 분 만나 예수를 알게 되고 또 한 헌신적인 수녀님의 보살핌으로 정말 기적적으로 한센 병이 낫게 되는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의 사회로 나와 닥치는 대로 일하며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으로 지난 2000년부터 한센병 전문 선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분입니다.

그분이 쓴 <소록도여 안녕/홍성사>이라는 책에 보면 그가 13살 어린 나이에 한센 병에 걸렸을 때, 그렇게도 가족같이 지내던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알려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작은 마을이라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온 동네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나와 우리 집 이야기로 수군거렸다.
“동네에 한센 병 환자를 그냥 두면 안 되는데....”
“격리 수용을 하든지, 어디로 보내든지 해야지 그냥 둘 수는 없어”
사람들의 염려와 웅성거리는 소리는 우리 집 식구들에게까지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아예 우리 집에 발길을 끊었다.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우리 집에 일 하러 오려는 일꾼이 없었다. 나 때문에 농사일까지 막대한 지장을 받았다.
마을 전체가 사용하는 공동우물이 공교롭게도 우리 집 앞에 있었는데, 소문이 난 뒤로는 누구하나 물을 길러 오지 않았다. 대신 집집마다 샘을 파는 소동이 벌어졌다. 나 때문에 일어나는 이런 일들이 내게 커다란 괴로움을 주었다.
‘나 하나 때문에 우리 가족만 괴로운 것이 아니고 온 동네 사람들 전체가 어려움을 당하는구나!’
육체적인 아픔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컸다. 어린 나이었지만 그런 것쯤은 알았다. 나는 괴롭고 슬퍼서 혼자 울고 또 울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 울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 필요도 없는 울음일 뿐이었다. 그러나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날마다 멍하니 앉아 서글픈 내 신세를 한탄하며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냈다. 화장실에 갈 때 외에는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미웠고, 가족에게까지 차츰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었다.

큰 형님은 나를 위해 동네에서 2킬로 떨어진 산골짜기에 움막을 지어줬다. 움막은 비바람을 피하도록 단단히 세워졌다. 그때만 해도 한센병 환자는 사람들과 격리되어 떨어져 살아야 했다. 나는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었다. 집을 떠나 움막으로 갔더니 할머니와 큰형님이 이불을 갖다 주고 혼자 끓여 먹고 지낼 수 있도록 취사도구를 갖다 주었다. 이제는 완전히 혼자였다. 넓고 넓은 세상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나는 혼자였다. 부모도 병든 내가 싫어서 곁을 떠났는데 세상사람 그 누구 나를 가까이 해 줄 것인가? 이제부터는 나 혼자 이 산 속에서 해와 달과 나무, 풀과 돌멩이, 그리고 산새와 산짐승들과 벗하며 살아야 했다.

밤이 되었다. 산속의 밤은 더욱 어둡고 음산했다. 밤이 깊어지면 여우의 울음소리가 고요한 산 계곡을 타고 메아리쳐 왔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병든 것도 잊은 채 움막의 문을 단단히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적막한 산골, 깊은 밤 중에 홀로 남겨진 어린이였던 나는 너무나 무서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공포에 떠느라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곤 했다.>>

한센 병 환자의 처지를 잘 나타내 준 글입니다.
여러분,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한센 병이 무엇입니까? 단지 외형적인 피부병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알려주는 한센 병은 무엇입니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 오히려 만나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존재, 어디에서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런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외면합니다. 그래서 사라들을 그를 격리시킵니다. 만나면 부정하다고 합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한센 병 환자에게 다가가셨고 그에게 손을 내민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마음을 대신하는 이 땅의 교회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되시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사회적 물질적 성공이 신앙적 축복이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크리스천이야말로 거듭난 자로서의 모범을 보이는 자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진정으로 기독교화 시킬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자들이라고 교회는 추켜세워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 그리고 가정적으로 유복한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대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인지 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산에서 내려와 제일 먼저 무엇을 했는지, 제일 먼저 누구를 만났는지를 알면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상처 입은 자들이 먼저 위로를 받아야하는 장소입니다. 천대 받고 무시당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더 이상 소망도 없고 희망도 없어 보이는 자들이라도 예수님의 손길을 붙들 수 있는 장소여야 합니다. 과거에 큰 죄를 지어 세상적으로 손가락질 받는 자라 할지라도, 용서 받지 못하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 마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며, 그 본질을 잃었다면 다시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개혁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은혜에 의한 구원과, 신분의 구별 없이 모든 교회와 교인의 하나 됨을 믿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적인 헌신을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세상의 변혁과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의 현실에서 이와 같은 신앙의 전통과 올바른 정신이 희석되어 가는 현실을 목격합니다.

때로는 교회적 유익을 핑계 삼고, 때로는 세상과의 소통을 핑계로, 또는 현실적 한계를 구실 삼아 예수의 정신이 아닌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더러는 오늘의 상황에서 교회를 지켜 보존하려면 세상의 가치와 연대가 불가피하다고 말하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런 논리로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지 못합니다.

한센 병 환자와 같이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들, 아무런 희망이 없어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 아주 작은 희망조차 갖기 힘든 상처투성이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감싸고 안아주고 보호해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고 속죄함 받아 한없이 기뻐하는 곳이 바로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작은 힘이 모여도 큰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커지는데 덩치 큰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회의와 조직의 관리에만 힘을 쏟느라 마땅히 해야 할 교회의 본질을 잃어 간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다시 작아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본질에 힘쓰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세력과도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개혁입니다.

우리 재일대한기독교도 그 근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한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만들어진 교단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재일대한기독교회라는 교단도 개혁교회의 범주에 속하는 교단이고 우리 동경교회도 바로 개혁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개혁교회의 근본은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는 교회이다> 라는 말에서 잘 나타나듯이 현실에 대한 끝없는 성찰과 자기점검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교회를 개혁교회라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동경교회도 종교개혁기념주간을 보내면서 개혁을 위한 고민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개혁이란 무엇입니까? 개혁은 바로 잃어버린 본질을 찾는 것 바로 그 자체 인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손길로 속죄함 받아 기뻐하는 곳, 특별히 한센 병에 걸린 사람과도 같이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따뜻한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아 한 형제 자매가 되는 곳, 그래서 그 기쁨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과 싸워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100년의 세월 속에
잘못된 교회의 이해는 없습니까?
100년을 기뻐하기에 앞서
우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속죄함 받은 자들이 기뻐 주를 찬양하는 교회가 되도록,
오로지 그 모습만이 교회에 있도록
날마다 바로서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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