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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3일 주일] 눈은 눈으로

눈은 눈으로

마 5:38-42



어느 사장님이 경영하는 작은 회사에 오래도록 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봉사했던 교회의 안수집사님이셨습니다. 회사의 직원예배가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사장님이 강제로 모이게 하는 것이라면 항상 예배의 분위기는 좋지 않습니다. 그 회사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나름대로의 목표를 갖고 열심히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반복되는 예배 가운데 사장님보다 오히려 사원들과 친해지게 되었고 후에는 그들이 왜 예배를 좋아하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장님 때문이었습니다.

사장님은 늘 직원들에게 밤늦게까지 잔업을 시켰고, 비인격적으로 직원을 대했으며, 인금을 늘 늦게 지급했는데, 밀린 인금에 대해서도 아무런 미안함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세금을 덜 내기 위해 늘 장부를 정리하는 직원들에게 옳지 못한 주문을 일삼고, 자신은 항상 밖으로 다니며 한달의 반은 골프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배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예배시간이 업무시간이 아닌, 예배 때문에 더 한 시간 더 일찍 출근하여 예배를 드려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이 이쯤 되면 예배를 인도하면 목사로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배를 계속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말아야 하는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부터, 과연 예수를 잘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원론적인 문제까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모두의 일인데, 사회생활의 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이와 유사한 고민이나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오늘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성경의 말씀을 남에게 들이대어 예수를 잘 못 믿고 있다고 남들을 판단하는 데에 사용하지 마시고, 나도 모르게 예수 믿는 사람으로 잘 못 행동할 수 있는 나 자신에게 적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말씀을 예로 들면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출21장, 레24장 등에 나온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신 말씀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21:23-25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레24:19-20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것이며

신19:21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그런데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유쾌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용이 조금은 섬뜩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너무 잔인하지 않는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이 구약의 말씀을 읽으면 신약에서 하는 예수님의 말씀의 참된 의도를 찾기 이전에 먼저 두 가지 큰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① 첫째는 구약의 율법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은 정말 자비의 하나님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성경에서는 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 곳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설명하는 내용과 연결된 구약에 나와 있는 이 율법의 내용을 보면 사랑, 자비라는 말을 쓰기에는 어폐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랑과 자비 보다는 계산이 정확하고 손해 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느 하나님이 옳다는 것입니까?

② 또 하나 모순이 느껴지는 것은 구약의 하나님의 율법과 신약의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큰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이고 불변하다고 하는데 이 말씀은 구약과 신약이 서로 모순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구약과 신약이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과 구약 자체도 모순이 있습니다.

잠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애가3:30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어떤 사람은 이 모순 된 내용의 부분을 율법도 완성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상태로 진화되거나 발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완전한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과 신약의 말씀은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인데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명령을 예수님께서는 다르게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의 성경의 본문을 읽을 때 느끼는 이 두 가지의 의문점을 풀면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예수님의 의도를 잘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당시의 구약의 법의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구약성경의 율법은 시기적으로 당시 고대 중동의 통치의 기초가 되었고 또 현대 법률의 기초라고 알려진 함무라비 법이 바벨론을 다스리던 시대에 나온 것입니다. 당시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이 함무라비 법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법의 내용과 하나님이 새로 제정한 율법의 내용을 먼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함무라비 법 중에 오늘 구약의 율법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인데 그 부분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함무라비 법에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신사>와 <노동자>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한 신사를 눈을 실명케 했다면 그의 눈 하나는 실명되어야 한다. 만일 신사의 사지 중 하나를 부러뜨렸으면 그 노동자의 사지 중 하나를 부러뜨려야 한다. 그러나 만일 신사가 가난한 노동자의 눈을 실명케 했거나 가난한 노동자의 사지 중 하나를 부러뜨렸으면 그는 은 한 미나(돈의 단위)를 지불해야 한다. 만일 자기와 동등한 사람의 이빨을 부러뜨렸다면 그의 이빨도 부러뜨려야 하지만 신사가 가난한 노동자의 이빨을 부러뜨렸다면 그는 은 삼분지 일 미나를 지불해야 한다.]


함무라비 법이 위대하다고들 말하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이해가 가지 않는 형편없는 내용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평등하질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이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율법이 세상의 법보다 훨씬 더 좋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당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모든 사람의 평등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율법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구분이 없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의 위치에서 이스라엘 노예 한 사람을 쳐 죽였을 때 애굽 법으로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는 더 이상 지도자의 위치에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강한 자나 약한 자 모두에게 같은 법의 적용을 한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자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제정한 율법에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넣었던 것입니다.

출21:23-25과 같은 내용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내용은 사회 질서를 세우는 기준으로 엄하게 쓰여진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을 평등하게 여기는 정신 위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행동의 기준으로는 레19:18의 말씀과 같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시는 가르침의 내용과 원래 구약의 율법의 내용은 그 기본 정신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가르치시는 말씀 속에 생활 중에 겪게 되는 상황을 세 가지 예로 들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① 오른편 뺨을 치거든

대부분이 오른손을 썼던 유대인들에게서 사람의 오른편 뺨을 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오른쪽 뺨을 때리기 위해서는 뒤에서 때리거나 손등으로 때리는 방법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손등으로 사람을 때리는 것은 유대법상 사람에게 두 배의 모욕을 주는 것으로 해서는 안 될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오른쪽 뺨을 때린다는 것은 매우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모욕을 참으라는 것이고 그런 욕을 당해도 분개하지 말고 복수하지 말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②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

원래 유대인들은 속옷만 저당 잡을 수 있도록 율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였습니다. 겉옷은 가난한 자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물건이었으며 밤에는 이불을 대신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해가 지기 전에 옷은 꼭 돌려주라고 명령을 한 것입니다.

출22:26-27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약한 자들의 상황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권리보다 약한 자를 향한 의무를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이것은 강제적인 노역을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점령지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극히 소수였던 로마 시민권자가 아닐 경우에는 누구든지 로마인들의 명령을 언제나 따라야 했고 그것은 일상생활 중에 늘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구레네 사람 시몬이 로마 군인들의 명령을 받고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은 바로 좋은 예 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바로 그런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제로 노역에 동원이 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즐겁게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해야 할 일을 억지로 하기보다 기쁨으로 봉사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인간관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엮어 놓은 인간관계도 있지만, 아버지나 어머니 같이 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맺어진 인간관계도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절대로 나쁜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너무 많은 관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남을 배려하는 것을 아예 포기하거나 또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사회 속에서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제자 된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문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복수하지 말고 참으라는 것입니다. 권리보다는 의무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자신의 상황 속에서 열심히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에 소개해 드린 그 안수집사님 사장님으로 돌아가 봅니다.

그 사장님이 사장님으로 존경을 받고 나아가 예수님의 향기를 발하여 직원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하여서는 먼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잘못된 예배를 없애야 됩니다. 그리고 직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줘야 합니다. 인금은 밀리는 일이 없어야 하고 노력한 만큼 정당한 인금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골프를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정확한 세금을 정직하게 내야 합니다. 옳지 못한 일을 직원들에게 시켜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결정하여 행동하기 때문에 남들의 생활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또 해서도 안 됩니다.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적어도 자신이 교회의 직분자라고 한다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뒤에 게시는 하나님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직하지 않고서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먼저 실천에 옮긴다면 그 분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으로 직원들이 인정해 줄 것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힘들지만 그렇게 살아 하나님의 인정받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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