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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9일 주일] 맹세하지 말찌니


맹세하지 말찌니

마5:33-37



최근에 미국 버지니아에서 있었던 한국학생에 의한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은 우리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범인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이 아닌 남의 나라에 살고 있는 똑같은 입장에서 그를 이해할 수 있으며 안타까운 마음마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은 그가 사건을 벌이기 전 기독교인에 대해서 많은 증오심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그런 보도를 접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그의 주변에 있었던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행동하였기에 그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을 증오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그 사건을 접하면서 직업병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 번 사건을 하나의 단순한 사건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무언가 크게 잘 못 가고 있는 교회를 향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교회에 깨달음을 주기 위해 벌어지고 있는 하나의 상황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인이 많지 않은 일본은 별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만 기독교인이 제법 많은 한국에서는 지난 2년 새 예수를 잘 믿는 것으로 일려진 젊은 연예인들이 자살을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젊고 예쁜 가수와 배우들이 세 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많다보니 별 사람이 다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확률로 말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일이 이 쯤 되면 저는 좀 극단적인 생각일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 교회에서 신앙을 가르치는 목회자들이 법정에 서서 한 번쯤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젊은이들이 왜 자살을 했을까?」 하며 그들을 비난하기 이전에 그들이 삶의 힘든 문제의 돌파구를 자살이라는 것으로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교회가 책임을 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버지니아 사건도 같은 시각으로 보고 싶습니다. 범인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한인교회를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범인이 어려서 교회를 다녔건 다니지 않았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주변에 있었던 기독교인들이 보다 좋은 영향력을 그에게 주었더라면 그가 그렇게 기독교를 증오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많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사건을 통해서 한 번 더 반성하고 책임을 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건에 무슨 목사가 책임을 져야 하냐고 반문하실지 몰라도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1995년에 동경에서 있었던 옴진리교 신도에 의한 사린가스 살포사건은 사건 발생 11년 만인 지난 해 아사하라(麻原)라는 교주에게 사형선고를 내림으로서 일단락되었습니다. 교주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사린가스사건으로 12명이 죽어 교주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면 교회가 참된 그리스도인을 양성해 내지 못한 결과 32명이 희생이 되었다는 것도 논리적으로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기회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건에도 교회의 책임자의 잘못이 적지 않다 할 것입니다.

범인이 교회를 다녔을 때 교회는 무엇을 했습니까? 목회자는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젊고 예쁘고 발랄한 교회의 청년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인기 있는 연예인이 되었을 때 그 과정에서 교회는 무엇을 했으며 또 무엇을 그들에게 가르쳤습니까?


한결 같이 자살을 했던 사람이나 총격을 가한 범인이나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증오였습니다. 어떤 이는 돈 때문에 목숨을 끊었고 어떤 이는 많은 사람의 인기를 회복할 수 없어 목숨을 끊었으며 미국에서는 돈 많은 사람을 증오하며 총을 쏘았습니다. 도대체 돈이 무엇이기에 목숨과 바꾸며 인기가 무엇이기에 목숨을 가볍게 여긴단 말입니까? 도대체 돈이 무엇이기에 돈 때문에 받은 수치심이 크면 얼마나 크기에 그것으로 인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까? 교회는 돈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그동안 교회는 오랜 기간 돈을 축복으로 가르쳤습니다. 인기를 삶의 성공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으면 돈을 얻을 수 있고 인기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축복이요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얻는 복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런 왜곡된 믿음 안에서 행동했고 그런 목표를 위해 교회가 스스로 먼저 실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많이 모으고 예배당을 크게 지으며 물질적 축복의 개념을 설교와 함께 시청각 교육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기를 20-30년. 이제 그런 왜곡된 교회교육의 문제점들이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사회문제가 되어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의 자살과 버지니아의 총격사건은 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진정한 복음의 가치를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는 돈의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가치를 가르쳐야 합니다. 돈이 축복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가 축복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돈의 가치가 복음의 가치를 끌고 가게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가치가 돈의 가치를 끌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사람도 복음으로 인해 참된 행복과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도 복음 안에서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치 있고 소중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하며 복음이 주는 참된 가치와 복음이 주는 진정한 힘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 땅에는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반대감정을 갖는 것은 교리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기독교를 싫어하는 많은 사람들을 봐 왔지만 아직 기독교의 교리 때문에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동정녀의 탄생 때문에 기독교를 혐오하는 사람이나 예수의 부활 때문에 기독교를 멸시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기독교의 교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증오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바르지 못한 기독교인들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기독교인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아버지 때문에 상처를 받아 교회에도 가지 않는 사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장로님인 아버지 때문에 상처를 받아 예수 믿는 사람하고는 함께 일하지 않는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어려서 교회학교의 선생님 때문에 상처를 받아 다시는 교회를 가지 않는 사람을 저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신앙과 행동이 다른 것입니다.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정작 삶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 하나를 가르치십니다.

사회가 서로 믿지 못하면 믿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부연설명이 붙여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참기름>이라는 말 하나면 충분한 것을 사람들이 믿지 못하기 때문에 <순> 참기름이 되는 것이고 그것도 부족하여 <진짜> <순> 참기름이 되는 것입니다. 들깨로 기름을 만들면 들기름이 되고 참깨로 기름을 만들면 참기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면 족합니다. 서로 믿지 못하니 부연설명이 붙는 것입니다.

어느 한 지역에 식당이 생겨 소문이 나면 그 이름 그대로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식당들이 생겨납니다. 같은 이름을 씁니다. 그러니 생겨나는 것이 <원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원조도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슬픈 사실은 그 개념이 어느덧 버젓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에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습니까? 복음은 그냥 복음이면 됩니다. 복음이 진짜가 아니면 그것은 이미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복음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라는 말을 어느 때부터인가 믿지를 못합니다. 그 복음을 믿지 못해서 생겨난 것이 바로 <순복음>입니다. 어느 특정 교단을 꼬집으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순복음>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 단어에는 다른 교회의 복음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들어 가 있는 조금은 슬픈 단어인 것입니다. 복음은 그냥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신뢰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약속을 할 때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일상적으로 했던 맹세에는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당시의 사람들이 맹세를 함에 있어서 신성한 하나님의 이름이 경솔하고 부적절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의 이름을 걸고 그리고 부모의 이름을 걸고는 맹세를 하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는데(출20:7) 사람들은 밥 먹듯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그런 신성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다면 분명 생명을 걸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할 텐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 놓고도 그 맹세를 쉽게 어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지만 그것은 아무 경각심 없이 그저 습관성으로 하는 맹세였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 한국 사람이 서로 약속을 할 때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성(姓)을 간다」든가 「내 장(掌)을 지져라」고 맹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성을 간다고 맹세할 때 정말 여러분들은 일이 잘못되면 성을 바꿀 각오를 하고 맹세를 하시는 겁니까? 손바닥을 불로 지질 각오를 하고 맹세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맹세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아무 의미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죽기 전 날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대 제사장 가야바에게 끌려 가 심문을 받을 때도 유대교의 최고의 지도자인 가야바 조차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26: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글자 그대로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 어떤 맹세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맹세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맹세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인격이야말로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말 자체가 인격을 보증하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사람은 어떤 서약이나 맹세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더 믿을 수 있도록 자신을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결국 어떤 서약도 요구하지 않을 만큼 솔직하고 정직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만들어 나갈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사회가 더욱 신뢰할 만큼 더욱 좋아진다는 것을 뜻해야 하며 사회를 향해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무 광범위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다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도 어떤 의미에서는 교만입니다. 그저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이 일본의 한인사회를 먼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다 같은 느낌이겠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일본의 한인 사회는 그렇게 정직하지 못합니다. 깨끗하지 못합니다. 저는 일본의 선교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예수 믿는 한국 사람들조차도 일본사람들이 놀랄 만큼 정직하지 못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의 책임이 크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난 15일 주일에는 동경교회 주일 출석 인원이 100년 만에 처음으로 1000명이 된 날입니다.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책임감이 더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동경교회를 다니는 교인이 만은 만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만은 만큼 동경교회 성도님들을 통하여 일본사회와 일본의 한인사회가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기도>

우리의 정직함이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순수한 책임감이 복음을 전합니다.
일본에서는 그것이 더 중요한 선교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동경교회 교인들이 다 그리스도의 바른 제자로
일본사회에서 믿을 만한 사람 되게 하시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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