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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10일 주일] 아들의 이름 임마누엘

아들의 이름 임마누엘

사7:1-14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교리를 배워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첫 시간은 창조의 원리와 나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드린 바 있습니다. 오늘은 그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만들어질 때 필요한 로고스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며 나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이란 말을 알고 계십니까? 아마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몹시 어려운 일에 부닥쳐 앞으로도 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뒤로도 되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를 일컬어 진퇴양난이라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꼼짝 못하는 상황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잘 모르는 분은 아마도 한 분도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께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진퇴양난의 상황을 당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지금가지 살아오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당해 보셨겠지만 특별히 진퇴양난의 상황을 겪어 보신 적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정도로 매우 힘든 상황을 당해 보신 적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 희미한 가능성만이라도 보인다면 그렇게 절망하지 않을 텐데 그런 가능성마저 없어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을 당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에 그런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그럴 때에 어떤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까? 어떻게 문제를 풀려고 애쓰셨습니까?

사람이 힘든 문제에 부닥칠 경우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을 때 심한 압박감과 불안을 느끼게 되는데 그 때 내적 갈등이 매우 높아져서 우울증이나 약물중독으로 많이 빠지게 됩니다. 심리학적 접근입니다. 보통 여성의 경우에는 남성들보다 감정조절이 잘 안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 우울증에 빠질 위험이 있게 되는 것이고 또 보통의 남자들은 심하게 술을 마셔서라도 어려운 상황을 조금이라도 잊으려 하는데 그것도 다 약물 중독으로 보는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을 개척한 분 중에 한 사람인 콜만(Coleman)이라는 사람은 사람이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압박감과 불안을 느끼는 원인이 다르다고 보면서 현대인에게 있어서 사람이 이런 극도의 불안과 욕구좌절을 느끼는 원인 중 큰 것으로 <시간적 지연>과 <소유의 부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시간적 지연>은 무엇입니까? 내가 바라고 내가 원하는 것들이 나의 노력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시간적으로 매우 지연될 때 나타나는 불안을 말합니다. 가벼운 예를 들면 중요한 모임에 초대되어 가는 중 도로 교통이 매우 혼잡할 때 자동차 속에 내가 갇혀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은 불안하게 되고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학력을 중시하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대학에 진학했는데 나만 합격을 하지 못했습니다. 내게만 합격이라고 하는 <시간이 지연>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 극도의 압박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 <소유의 부족>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소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야 하는데 우리 집이 그 수학여행비가 없어서 여행의 행렬에서 빠진 경험이 있으십니까? 혹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키울 때 자녀들에게 다른 아이들처럼 많은 것 해주지 못해 마음 괴로운 적이 있으십니까?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로 심한 수치심을 당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소유의 부족>이나 <소유의 상실>은 극도의 불안한 감정을 초래합니다.

우리에게 압박을 주고 또 불안한 감정을 갖게 하는 원인이 참 많겠지만 현대인에게는 특히 이런 두 가지의 문제들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중 한 두 번씩은 당해 보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합니다. 믿음은 요술 방망이가 아니라서 내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믿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고난을 당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도 살아가다가 진퇴양난이라는 상황을 맞아 극도로 불안하고 압박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우리에게 있는 그 신앙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그 당하는 어려움에 있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그 문제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느끼는 그 불안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여기 죽을 만큼 큰 괴로움을 당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비록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는 지금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으며 심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이 사람은 바로 유다의 왕 아하스 입니다.

그가 극도의 압박을 당하고 있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당시는 북쪽에 강대국 앗수르가 있었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아람이 작은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가 워낙 강하기에 아람과 이스라엘은 유다와 더불어 동맹을 맺자고 제의해 옵니다. 이 때 유다 왕 아하스는 이들의 제의를 거절하고 친 앗수르 쪽으로 기울어 목숨을 부지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아하스를 죽으려고 유다로 쳐들어 왔습니다. B.C. 734년경의 사건입니다.

아하스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에 빠지고 맙니다. 이스라엘과 아람과 동맹을 맺자니 동맹군이라 해도 강대국 앗수르와는 상대가 안 될 것이고 앗수르와 동맹을 맺자니 지금 당장 이스라엘과 아람의 손에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상황이 바로 유다와 아하스에게 벌어진 상황입니다.

그 때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유다 왕 아하스에게 갑니다. 그리고는 아하스에게 담대히 말합니다.

7절) 「그들은 계획대로 하지 못합니다. 왕이여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아하스가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12절) 「나는 구하지 않을 것이오. 하나님을 시험치 않을 것이오.」

언뜻 보면 참으로 지식인의 양식 있는 대답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무조건 복만 달라고 하는 기복신앙과 또 물질적 풍부를 축복이라 여기는 신앙의 형태에 익숙한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싸구려 축복을 바라지는 않겠다는 아하스의 대답이 오히려 멋지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멋진 신앙적 양심을 갖고 대답한 아하스에게 하나님은 칭찬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의외로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반응은 「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세련되게 신앙생활을 하려 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나이 33살에 한 교회를 책임지고 목회를 시작했을 때 제가 내건 목회의 슬로건은 <세련된 목회>였습니다. 나름대로 많은 신앙인들이 그저 살려달라고만 기도하고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믿음이 참 보기 싫었습니다. 그것은 좀 유치하고 저질인 것인 냥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 말로 내가 하나님께 마음껏 희생하고 드릴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신앙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고 목회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제 목회에는 그런 것을 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고 성경을 볼수록 신앙이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련되지는 않아도 좀 유치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딸이 둘 있습니다. 같은 부모가 낳았는데 많지도 않은 두 아이가 왜 그렇게 서로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큰 아이는 어려서부터 지금껏 뭘 사달라고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한 번은 뭘 갖고 싶은 것이 없냐고 물으니 있긴 있는데 우리 집에 돈이 없어서 사달라는 말을 안 하는 것 뿐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희 집 큰 아이가 좀 어른스럽다고 말들 합니다. 저는 그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욕심이 아예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이를 그렇게 키우다 보니 백화점에서 옷이나 장난감을 사달라고 누워서 우는 아이들을 저는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둘째는 바로 누워서 우는 아이입니다. 눕기까지는 안 해도 사 줄 때까지 말을 안 합니다. 더 대답합니다. 제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그런 아이의 모습이 바로 우리 둘째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누구를 좋아할까요?
물론 둘 다 좋아하지만 우리 둘째 앞에 있으면 아빠라는 보람이 있습니다. 내가 저에게 무엇인가 해 줄 수 있다고 하는 것 그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빠로서의 뿌듯함을 갖게 합니다. 둘째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불신앙을 매우 싫어하시고 <괴롭다>고 표현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 된 우리가 그것을 인정해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에게 다시 한 번 말합니다.

12절) 「내가 징조를 보여주겠다. 내가 너를 살려주겠다고 하는 징조를 보여 줄 테니 제발 나를 믿어다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믿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도 못하고 우리를 구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징표를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괴로움을 잘 나타내는 모습인 것입니다.

징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언약의 표입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시는 분이시기에(민23:19) 말씀만으로도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입니다. 그러나 의심이 많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인간에게 말로만 약속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때 그 때마다 여러 가지 징표를 보여주어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보다 잘 믿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징표입니다.

창세기 9장에는 무지개라는 징표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의심 많은 이스라엘백성과 바로에게 10가지의 재앙을 징표로 나타내셨고 사사기 6장에서는 기드온에게 확신 있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 양털이 젖고 또 땅만 젖는 징표를 두 번씩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징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신다는 확신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시청각교재로 교육시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징표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는 지능이 낮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절하심이 오래 참으시는 중에 우리를 매우 쉽게 믿음의 길로 안내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이와 같이 징표를 보여 주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징표가 좀 특별합니다. 그것은 무지개나 양털 같은 것이 아니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하십니다. 처녀가 잉태하는 것은 기적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함께 하신다는 징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 자체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의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는 것을 보면 그리고 아들을 낳는 것을 보면 그것으로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증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징표는 아하스 왕에게만 주시는 징표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표입니다. 여러분 진퇴양난의 상황을 아십니까? 그런 어려운 상황을 혹 맞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또 앞으로 그런 상황을 맞게 된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할 텐데 <시간의 지연>과 <소유의 부족>으로 불안해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믿음은 쓸데없는 것이라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의 징표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아주 확실한 징표를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처녀가 잉태했다고 하는 그 자체입니다. 처녀가 잉태 했습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이미 베들레헴에서 마리아라고 하는 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징표입니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 죽을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의심 많고 미련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호소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앞을 봐도 캄캄하고 걸어 온 길을 되돌아 봐도 절망뿐이고 옆을 봐도 한 숨만 나오는 그런 카오스와도 같은 상황이 여러분들에게도 있으십니까? 여러분 그래서 얼마나 힘드시고 얼마나 괴로우십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의 징표가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했습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저는 어려서 갖고 싶었던 물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암행어사(暗行御史)의 마패(馬牌)입니다. 어려서 TV에서 암행어사에 대한 드라마를 했었는데 그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한 낯선 외지 사람이 어느 지방의 주막(酒幕)에서 밥을 먹는데 동네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고 끝내 큰 싸움이 벌어집니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누명을 쓰고는 관가의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입가에 미소가 있고 여유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어려움 속에 항상 여유 있는 웃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마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패가 무엇입니까? 임금님의 권세가 그에게 함께 있다는 징표가 아닙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에 불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을 주로 성탄절에만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년 내내 사장되어 있다가 성탄절만 되면 잠깐 예수님의 탄생 예언으로만 의미를 축소시켜 이 말씀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그런 얕은 의미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요 소망이 담김 우리를 살리는 말씀인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은 죽을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겠다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절망할 수 없는 징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을 상황이 닥쳐도 죽을 수 없는 그런 징표가 하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좌절할 수 없는 두려워할 수 없는 답답해 할 수 없는 그런 징표가 하나 있습니다. 그 징표가 있기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힘을 잃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처녀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건입니다.

카오스와 같이 뒤죽박죽인 진퇴양난의 상황이 내게 닥친다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로고스가 있어서 우리의 카오스의 상황을 코스모스로 안내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고스가 있음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그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의 징표 때문입니다. 그 징표가 바로 내게 생명을 주고 힘을 얻게 해 주는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것이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징표를 보여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그 복음을
우리가 외면하여 하나님을 괴롭게 해 드리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힘들고 어려워도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음을 보고
새 힘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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