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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6일 주일] 나를 사랑하는 오직 한 분



나를 사랑하는 오직 한 분

롬8:31-39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절로부터 40일 전의 고난 기간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기에 이 기간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예전과 달리 교회도 복잡하고 행사가 많아져서 사순절의 의미가 많이 사라지고 있지만 이 사순절의 의미는 우리가 기념하여야 할 소중한 절기임에 분명합니다. 오늘은 이 사순절에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며 지내야 좋은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 사람을 위하여 아름다운 이 땅을 만드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그것들을 맨 마지막에 지으신 우리 인간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주시기 위해 그토록 힘써서 이 땅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창조 속에 충만한 것이 하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 넘치는 사랑이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생명과 아름다움의 근본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큰 아이를 낳을 때 저는 만삭인 아내의 배를 보면서 한 달간 아이의 침대를 만들었습니다. 설계를 하고 나무를 자르고 못질을 하고 페인트를 칠해서 한 달이 걸려 침대를 만들었습니다. 교회 일이 많았기 때문에 늦게 퇴근을 해서 밤에 침대를 만들었습니다. 많이 힘들었지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내와 아이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정성을 다 해 무엇인가 만들게 합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도 그 사랑을 근원으로 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도 창조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사랑으로만 잉태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은 없습니다. 사랑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동물이든 간에 참으로 사랑하면 살고 미워하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의 법칙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최고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성경 66권의 말씀을 하나로 압축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 한다> 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사실을 성경에서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으로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십자가의 사건으로도 분명히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 목회에 많은 도움을 주신 김동호 목사님께서는 개를 무척 좋아하십니다. 개를 좋아하시기에 설교 중에도 가끔 개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십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오늘 목사님께서 개소리 하셨다!」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동네의 개가 있어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고 꼭 한 번 쓰다듬고 가십니다. 그러면 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싶어 하는 교인들은 「우리는 개만도 못해!」라고 농담을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집에서 개를 가족같이 키우시는데 그 개가 자기가 사람인지 개인지 모를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개와 친근하게 지내기 때문에 개를 사람같이 대해 주는 것은 이해가 가도 개와 친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이 개 취급을 당하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가 개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 훨씬 더 심할 수 있습니다. 그 비천함은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머리 둘 곳이 없이 다니시다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던 것입니다. 탄생과 생애와 죽음이 모두 비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죽도록 고민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자신에게서 옮겨 달라고 땀과 피를 쏟으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주님께서 스스로 지신 까닭은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요3:16) 는 그 한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그 고난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전부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능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깨끗하고 바른 의인이 될 때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로울 때도 사랑하시고 불의할 때도 사랑하십니다. 의와 불의는 하나님의 사랑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의한 자가 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불의한 자가 되었다고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해 놓고는 이제는 네가 죄를 지었으니 불의한 자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너를 버리셨고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속이지만 그것은 거짓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랑은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너희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사랑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회개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회개하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줄 때마다 짜증을 내며 억지로 하는 부모를 보지 못했습니다. 기저귀는 아이에 따라서 약 7000번에서 10000번 정도 갈게 되는데 장부에 그것을 기록하는 부모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한 번 갈 때마다 적어 놓고 나중에 그것을 아이에게 청구하려는 어머니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냄새가 나도 더러워도 기저귀를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로울 때 불의할 때를 구분치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잘 났을 때나 못났을 때나 그것을 구분치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 그 때를 구분치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오늘 성경 본문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며 불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이라고 하는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키에르케골 이라는 철학자는 절망이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이 맞는다면 소망은 생명에 이르는 약이 될 것입니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백양이 무효합니다. 그러나 생명 같은 이 소망이 절망을 이기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이라는 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얼마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씀인지 모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를 위하여 아끼지 아니하신 분이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더 아끼겠느냐?>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왜 은사로 주시지 안니하겠느냐?>
<왜 너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을 것처럼 미리 절망하고 낙심하느냐?>

이것이 오늘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실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 놀라운 삶의 기회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도 우리에게는 환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어려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고통들이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에게 우연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필연적인 일이며 의미 있는 일이며 가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단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뿐 우리에게 무익하거나 우리에게 해로운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 이상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데도 막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인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에 자식에게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것을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am로 절대로 우연한 일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 하나님이 뜻하지 않는 일 우리에게 해로운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때로는 힘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환란이라고 부르고 곤고라고 하며 기근이나 적신 위험과 칼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만날 때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일들을 주시는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내가 믿는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능력 있는 분이시기에 이 일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다.>
하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얄팍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한 것만을 믿겠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이해하려들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놓고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그 자체가 너무나도 얄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세대학교 영문과에 임철규 교수님이 <눈의 역사 눈의 미학>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보면 눈은 무엇을 인식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반면에 일부분만을 알게 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삭제케 하여 관찰자를 가두어 놓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 <백문이 불여 일견>이라 하여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다 진리 같고 옳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늘 일부분이고 항상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해하고 믿는 다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먼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을 때 그 속에 숨겨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 가운데 역경과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면 그 역경과 고난도 기회가 됩니다.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불완전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시 같기도 하고 기도문 같기도 한 그런 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쓰실 수 없다고 느껴질 때
다음의 사람들을 기억하세요.
노아는 술 취한 사람이었고...
아브라함은 너무 노쇠하였고...
이삭은 공상가였고...
야곱은 거짓말장이었고...
레아는 못생겼었고...
요셉은 학대를 받았었고...
모세는 말을 잘 못했지요.
기드온은 두려워했고...
삼손은 긴 머리에 바람둥이였고
라합은 기생이었고
예레미아와 디모데는 너무 어렸었고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하였지요...
엘리야는 심한 우울증 환자였고
이사야는 벌거벗은 설교자였고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하였습니다.
나오미는 과부였고
욥은 파산한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였고
제자들은 기도하다 잠이 들었고...
마르다는 모든 일에 대해 근심하였고...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이 씌웠었고
사마리아의 여자는 남편이 다섯이었고...
삭개오는 키가 너무 작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핑계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쓰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완전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믿음은 그것이 환란이든 기근이든 적신이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여 우리의 삶에 기회와 축복이 되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여전도사님께서 성탄에 카드를 한 장 보내오셨습니다. 그 여전도사님께서는 평생 혼자 사신 분인데 지금은 은퇴하여 한국 경기도 양평에 있는 은퇴 여전도사 생활관에서 생활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 카드에는 다른 성탄카드에서는 볼 수 없는 문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그 분은 남편이 없는 분입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보면 외로운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그가 외롭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러나 그 전도사님의 삶은 절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혼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있어 외롭지 않고 주와 함께 동행함으로 초라하지 않고 주와 함께 동거함으로 쓸데없는 열등감에 젖어 살아가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저는 여러분들이 이 믿음을 갖고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때로 세상은 우리를 버리는 것 같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초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것 외에 더 믿을 것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은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잠시 당하는 환난과 고난까지도 기회로 삼으며 아름답게 당당하게 살아가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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