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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5일 주일] 바른 기도생활


바른 기도생활

마26:36-46




지난주에 우리 교회는 에스라 성경학교의 졸업식을 가졌습니다. 저는 졸업식의 설교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말씀이 매우 중요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연구와 실험을 계속 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말씀을 연구하지 않으면 말씀의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말씀의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게 되고 결국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즉 신앙생활에 있어서 혼탁한 영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기독교의 기초적인 교리를 재점검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한국교회에서 <일천번제헌금>이라는 것을 드립니다. 헌금을 천 번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주로 약 3년 가까이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천 번 헌금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일천번제의 유래는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에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것에서 유래했는데 (왕상3:4) 여기에서의 「번」 자는 「차례 번(番)」자가 아니고 「구울 번」 「태울 번(燔)」자 입니다. 즉 양 일천 마리를 한꺼번에 태워 번제(燔祭)로 드렸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일천번제의 헌금을 하라는 것은 최소한의 신학을 모르는 차원도 아닌 최소한의 한자도 모르는 무지에서 나타나는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언(預言)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성경은 구약에서 예언자(預言者)를 나타낼 때 이 단어를 쓰고 있고 신약에서는 성령의 은사의 하나로 예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의 원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자들이고 신약 고전14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고전14:1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고전14:1
힘써 남을 사랑하고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런데 이 예언의 뜻을 앞의 일들을 알아맞히는 점쟁이 식의 예언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일을 알아맞히는 점쟁이 같은 예언기도가 성령의 은사인 냥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성경의 해석은 잘못된 신앙행위를 가져오게 되며 이는 결국 심각한 영성의 혼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오사카(大阪)로 가야 하는 사람이 이정표를 잘 못 보고 센다이(仙台)로 갔다고 한다면 이는 큰일이요 결코 목적지인 오오사카(大阪)으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극단적으로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성경과 신학의 기초적 지식 없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면허 없는 의사가 수술하는 것과도 같이 위험하다고.




오늘은 우리 기독교의 신앙생활 가운데 어쩌면 가장 중요하고 또 생활 중에 가장 많이 하게 되는 기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십일조 헌금이나 전도와는 달리 신앙의 초보자들도 쉽게 할 수 있는 신앙적 행위입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기도에 대한 상식선의 지식이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앙과는 관계없이 기독교의 지식과는 관계없이 우리가 아는 형태의 기도를 대체로 의심 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기도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 기도의 바른 의미를 알고 바른 기도 생활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오늘 기도에 대해 생각할 때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선의 기도의 형태 그러나 기독교적인 아닌 기도의 형태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그것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기독교의 바른 기도의 정신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신앙의 모습에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전통 종교들입니다. 특히 이 전통 종교들은 기독교신앙에 많은 부분 영향을 주어서 신앙생활에까지 잘 못 들어와 있는 것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예배의 형태부터 시작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런 전통종교의 모습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 중 기도에 대해서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잇는데 기독교의 바른 기도생활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바르지 못한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무교(巫敎/shamanism)의 영향입니다. 무교는 모든 인간의 행 불행(幸 不幸)이 귀신으로부터 온다고 믿고 있는 무속종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병이 들거나 사업이 잘 안 되면 그렇게 만든 그 귀신을 내 쫓아야 한다고 생각해 무당에게 굿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무당은 귀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를 해 주는 사람(shaman)으로 귀신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주고 귀신을 내 쫓는 굿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굿을 의뢰한 사람은 굿에 같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돈만 주고는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 무당이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배를 「본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를 무당과도 같이 귀신을 내 쫓는 전문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기도란 인간의 모든 악재를 물리치는 귀신을 내 보내는 행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무교의 영향으로 들어오게 된 기도의 형태는 강한 힘(영성이라 말하기도 함)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목사에게) 기도를 의뢰하면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기도 차체가 귀신과의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두 번째는 불교(佛敎)의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 불교는 원래 인도에서 발생한 철학과 심리적인 문제를 다룬 종교입니다. 사실 종교라기보다는 무신론적 휴머니즘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가서는 종교적 요소가 가미 되어 부처를 신으로 생각하는 「보살 신앙」이 형성이 되었고 그 중국의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보살이란 해탈(nirvana)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중생을 돕기 위해 세상에 남은 자로 중생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보살 중에 인간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아미타 보살과 인간의 모든 기도를 들어 준다는 관음(觀音)보살을 많이 의지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이 두 보살을 연속적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주문을 외듯이 많이 부르면 부를수록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불자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무」 혹은 「나미」라는 말은 옛 범어로 ~을 향하여 라는 뜻의 말입니다. 즉 아니타 보살을 향하여 관음 보살을 향하여 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불교의 영향으로 들어 온 기도의 형태는 오래도록 길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어려울 때마다 주문을 외듯이 신을 반복해 찾으면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영향은 도교(道敎)의 형태입니다. 도교는 원래 중국의 도덕경(道德經)과 주역(周易)을 기초로 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자연스러운 것을 최고의 덕으로 삼는 철학이었으나 중국의 무속신앙과 한국의 무교와 결합이 되어 독특한 종교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교는 자연 속의 기(氣)를 찾아 인간이 그 힘을 얻는 신앙형태와 음양설(陰陽說)에 의한 인간의 운명과 재수를 점치는 점술(占術)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렐루야 기도원의 생수」가 나오는 것이고 「예언기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초기에 많은 영향을 미친 길선주 목사님은 원래 도교의 「길 도사」였습니다. 그 분은 밤 12시와 새벽 4시에 물에 기(氣)가 가장 세게 녹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 시간에 자정수(子正水) 7사발씩 마셨다고 합니다. 또 예수를 믿고 난 뒤에는 기가 제일 세게 모아지는 새벽 4시에 기도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잘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한국의 새벽기도의 시조입니다.


종합해 보면 한국기독교에서 기도라는 것은 많은 전통 종교들의 신앙형태와 결합이 되어 그 순수한 가르침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교와 결합되어 귀신을 내어 쫓는 행위 귀신의 힘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행위로 발전되고 불교와 결합되어 어려움을 극복하는 주문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도교와의 결합으로 운명을 알아내는 예언과도 같은 형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기독교인들이 기도에 대해 생각할 때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생각을 막연하게 갖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기도는 모든 악신을 물리치는 힘이라 생각하는 것과 둘째는 오래도록 많이 기도하면 좋다는 생각 또 기도에 깊이 들어가거나 기도에 은사가 있으면 사람의 미래를 점칠 수 있다는 생각들이 공통적으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기독교의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라 가르쳐 주고계시지 않습니다. 오래 해야 기도의 응답이 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단9:23에는 다니엘이 기도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나타나 기도가 응답 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가브리엘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하나님이 명령을 내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이 하고 오래 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에서의 기도란 무엇일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기도는 어떤 영향을 주며 어떻게 기도하여야 가장 바른 기도가 될까? 이제는 그것을 하나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는 흔히들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라 말합니다. 맞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화란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바른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정말로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은 자기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인 것입니다. 저도 상담을 공부했었습니다만 좋은 상담자는 내담자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하는 우리들은 이런 기본적인 상식을 늘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대화의 상대로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내 말만 많이 하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 중에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들의 길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늘 집중되어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속성도 있고 그 방법도 여러 가지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 한 가지 말씀을 드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사기에는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이제 태어날 아이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데 그 기도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삿13:812
8)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12)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구약의 기도의 완성은 다니엘에서 가장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일곱 배나 뜨겁게 타오르는 풀무 불에 들어가게 되는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살려달라고 했겠지만 그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그 유명한 말 한마디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단3:18)」 라는 고백이 바로 그 기도입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엘리야 이사야를 비롯한 모든 선지자들이 바로 이런 기도의 생활을 했던 분들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친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마6:10에서 바른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결론부분으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기도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기도의 본을 보여주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바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고민하며 기도하실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 라는 바른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마26:36-39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 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여기에 기도의 완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하는 모든 기도의 끝부분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기도를 할 때 그 떼에서야 비로소 기도가 바르게 완성되는 것이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바른 기도에는 눈물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맞지 않을 경우 나의 뜻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내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듣는 것입니다. 나의 계획과 소망 보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소망을 알기 위해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기도는 나의 말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겸허히 듣고자 하는 그 마음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기도회에는 대체로 예배의 형식을 갖습니다. 수요기도회 금요 철야 기도회 새벽기도회 모든 기도회에 예배가 있고 그 가운데 설교가 길게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분들은 새벽에 기도하러 나왔는데 기도시간은 주지 않고 설교만 한다고 불만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는 것은 좋은 기도의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기도의 제목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말씀대로 생활하고자 자신의 욕심을 포기하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나의 욕심을 버리는 행위이고 그래서 기도에는 항상 눈물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왜 기도를 함에 있어서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하나님께서 가장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내 삶을 맡기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꽤 오래 전입니다. 대학을 다닐 때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한 큼직한 사진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무 오래 되어 그 제목이 무엇인지 그 책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카톨릭 출판사에서 펴낸 사진집인데 그 사진집 중에 있었던 사진 한 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한 젊은 여인이 서류봉투를 들고는 어딘가를 물끄럼히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왜 눈물을 흘리는지 전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뒷장에 사진의 제목과 설명을 보고서야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진의 제목은 <기도>였습니다. 그 작가는 그 사신의 제목이 왜 <기도>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쁘장한 한 젊은 여인이 어느 수녀원에 들어가기 위해 원서를 사 들고는 원서접수와 절차를 안내하는 게시판을 보고 있었는데 작가가 그 장면을 잡아 한 컷 찍은 사진인 것입니다. 그 젊은 여인에게는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멋진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예쁜 가정을 꾸미고 싶은 소박한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능력 있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꿈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제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입니다. 수녀원에 들어가면 보통의 여자들이 생활하는 그런 생활을 다시는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녀원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과 평생의 세상적인 삶을 포기해야 하는 아픔이 교차되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작가는 그것을 <기도>라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음성에 나의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귀신을 내쫓는 것도 아니고 어려움을 물리치는 주문도 아니고 장래의 일을 점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욕심의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때 쓰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귀를 기울이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 동경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이런 바른 기도의 생활을 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다 실기를 바랍니다.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른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일깨워 주시옵소서.
나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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