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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9일 주일] 마구간 과 말구유


마구간 과 말구유

누가복음2:1-14





일본처럼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나라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어느 방송에서 들었습니다. 일본의 호텔이나 백화점 유명 쇼핑센터들은 그 해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에 대해 많은 투지를 하며 준비하는데 그 제작과정은 철저하게 비밀리에 붙인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들을 볼 때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하고 예쁠수록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되고 사람이 모이면 장사가 잘 되기 때문입니다. 벌써 六本木힐스에는 밤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차량의 통행이 힘들 정도가 되었고 お台場나 表參道 거리도 많은 젊은이들로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경쟁적으로 멋진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것은 이제 기업들의 중요한 마케팅 전략이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점점 화려해 지고 거리는 옛날보다 더 흥이 나고 그래서 더 이 크리스마스 시즌이 즐거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 기간이 참 좋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크리스마스를 참 좋아하고 많이 기다립니다. 작은 아이는 벌써 손가락을 펴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아이가 기다리는 것은 산타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그 산타가 갖고 올 선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선물을 못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착한일 하며 순수하게 기다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좀 컸다고 착한일과는 관계없이 산타가 온다는 것을 압니다. 또 잘하면 여러 번 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선물을 더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중학생인 큰 놈은 더 웃깁니다. 산타는 없지만 선물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막내에게 산타가 없다는 것을 폭로하지 않는 조건으로 부모에게 더 큰 선물을 요구합니다. 현찰이 제일 좋다고 노골적으로 얘기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즐겁습니다. 아이들에게 성탄은 선물을 받는 기쁜 날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른들도 기뻐합니다.

어쩌면 성탄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도 성탄의 분위기는 참 좋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캐롤을 부르고 찬양을 하고 모여서 친교하고 선물을 교환합니다. 모두가 다 성탄을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만큼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남들은 다 즐겁게 이 계절을 지내도 우리는 가장 중요한 그 하나 성탄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교인으로서의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을 맞이할 때 그 성탄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입니다.

해마다 2월 14일이 되면 젊은이들은 연인들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쵸콜렛을 선물로 주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 바로 발렌타인데이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원래 성 발렌타인 신부의 죽은 날을 기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로마시대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전쟁의 징용을 위해 결혼을 금지시킨 때 발렌타인 신부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혼주례를 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발각되어 결국 신부는 처형되었는데 감옥에서 간수의 딸에게 사랑의 쪽지를 전해준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풍습의 시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촐콜렛만 잘 팔리고 있습니다. 주객이 전도 된 것입니다.

성탄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된 지 벌써 오래입니다. 그 본래의 정신은 다 사라졌고 그 기간을 보내는 사람의 자세도 다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탄의 의미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이 성탄을 맞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알아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 보다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몇 가지 심볼에 대한 이해를 잘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심볼은 상징을 말합니다. 어떤 모양이나 어떤 단어에 의미를 넣고 그것을 볼 때마다 그것을 생각할 때 마다 그 안에 있는 참된 의미를 생각게 하는 것이 심볼입니다. 성탄의 심볼은 산타가 아닙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아닙니다.





첫 번째 심볼은 베들레헴의 마구간입니다.


성경은 왜 아기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는 가 설명하면서 오늘 본문 7절에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있을 곳이 없었다는 것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 땅의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있을 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입니다.

회사를 몇 개 갖고 계시는 사장님을 알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회사를 다니며 예배를 인도했었습니다. 새로 한 회사를 만들고 가끔 그 회사들을 돌아보는데 하루는 새로 입사한 것 같은 한 젊은 여사원이 회사의 현관에서 사장님을 막더랍니다. 지금은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아마 그 여사원의 눈에는 이 사장님이 잡상인쯤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좀 분위기가 이상해서 밀치고 사무실 문을 열어보니까 점심 먹고 모여앉아 화투를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사원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장님을 몰라보면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도 똑같은 상황을 당하신 것입니다. 말 한마디면 바꿀 수 있는 상황 마음만 먹으면 다 엎어버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언제든지 예루살렘의 화려한 왕궁에서 탄생할 수 있는 몸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몰라본 인간의 무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아야 평화를 줄 수 있다면 참아야 구원을 줄 수 있다면 하나님은 기꺼이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구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 마구간은 수치와 무안을 참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의미이요 마구간의 뜻인 것입니다.
성탄의 정신은 이것입니다. 한 번 더 참는 것입니다. 한 번 더 양보하는 것입니다. 내가 더 낮아지는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하늘에 영광도 없는 것이고 이것에 평화도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구유입니다.


여러분 구유가 무엇입니까? 구유란 원래 말이나 소의 여물통을 말합니다. 설교이지만 여물통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날 즉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도 지키고 있는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성찬의 의미를 일러 주셨습니다. 떡을 떼며 이것을 너희를 위해 찢기는 나의 살이라 하셨고 잔을 들고는 이 잔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내 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살을 주셨고 당신의 피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우리가 먹고 새 생명을 얻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먹이시기 위해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것 갑자기 일어난 사건입니까? 즉흥적인 일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먹이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태어나면서 여물통에 누워 있습니다. 「나를 먹어라!」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를 먹고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나를 주어야 합니다. 내가 찢기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남들이 나를 먹겠다고 하면 그냥 내어 주십시오. 거기에 영광이 있는 것이고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모하며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좋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대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같은 교회에서 서로 교제하고 어려울 때 도움 받는 그런 사람들의 울타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따라 그의 삶을 본받으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삶은 그것은 마구간과 구유로 대표됩니다. 마구간은 오래 참는 것이고 구유는 나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다 보면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본질은 다 사라지고 인간의 군상 속에 보편적 성격들만 나타납니다. 그래서 높아지려 하고 그래서 소리도 많이 납니다. 시기도 있고 질투도 있고 아픔도 있고 괴로움도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여러분의 자리를 뺏으려 한다면 여러분의 자리를 양보하실 수 있으십니까? 누가 힘들게 쌓아 온 여러분의 일들을 가져가려 한다면 그냥 내 줄 수 있습니까? 여물통에 누워 <나를 먹어라!> 할 수 있으십니까?


일본의 유명한 작가 엔도슈샤쿠(遠藤周作)의 <침묵/沈黙> 을 읽어 보셨습니까? 소설의 배경은 豊臣秀吉가 가톨릭을 박해하여 수많은 가톨릭 사제들과 신도들이 고문 받고 박해받고 처형되던 당시입니다. 그 뒤를 이어 德川家康 장군도 豊臣秀吉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을 박해하여 일본에서는 가톨릭의 선교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던 때 이 소설은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순교자들의 이야기와 그를 지켜보는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의 종교적 고뇌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하나님은 고통의 순간에 어디 계시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카톨릭 신자들을 하나씩 죽일 때 예수의 초상화를 땅바닥에 놓고는 그 그림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살려준다 말합니다. 끝까지 초상화를 밟지 않고 죽음의 길을 간 순교자들과 자신의 나약함으로 성화를 밟고는 괴로워하는 사람들 사이에 깊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세바스찬 로드리고 신부는 그 그림으로부터 들려오는 예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밟아라 밟아도 좋다. 밟히기 위해 내가 온 것이다. 이제 가거라. 가서 네가 해야 할 일을 이루어라!」


성경은 예수님의 본질을 이렇게 말합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는 것 오히려 멸시를 받고 사람들이 싫어하고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것(사53:2-3) 이것이 예수를 나타내는 가장 정확한 말들입니다. 단순히 글로 표현하는 것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나 머리 둘 곳이 없이 이 세상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기까지 그의 삶의 자세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리스도 제자들이라고 하는 우리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세상이 분주합니다. 모든 사람이 즐거워합니다. 교회 안팎의 이러한 분주함은 <성탄>의 참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가 인간을 죄에서 구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그것도 베들레헴 마구간에 말구유에 누우셨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시 말해서 <예수 오심>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는 마음가짐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이 번 성탄에 어떤 다짐을 할 수 있을까? 교이들에게 이렇게 하시라 저렇게 하시라 말을 해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가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먼저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번 성탄에 저는 새롭게 주님을 따르려 합니다. 주님의 자세를 본받으려 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내가 품고 그 예수님의 모습대로 나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될 수 있으면 우리 교회에서 나의 힘을 없애려고 합니다. 내 마음으로도 없애려고 노력하겠지만 제도적으로도 없애려고 합니다. 담임목사의 권한이 많이 없어져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높아지려 하지 않겠습니다. 유명해지려고 애쓰지 않겠습니다. 제가 먼저 양보하고 참고 희생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면 교회에 평화가 깃드는 길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부흥집회 같은 것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집회의 강사를 유능한 부흥사나 유명한 목사님을 초청하지 않고 불교의 스님과 천주교의 신부 그리고 기독교인이 아닌 유명인을 초청해 개신교 밖에서 보는 교회에 대한 강연을 했었습니다. 그 때 일반인으로는 전 문화부 장관을 하셨던 문학평론가인 이어령 교수님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 분은 심정적으로 자신이 불교인은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얼굴을 보면 그 얼굴에는 인자와 자비의 모습은 있지만 구도자의 고민이나 고뇌에 찬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구도자 치고는 너무 뚱뚱하다 말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마른 모습에서 구도자의 진지한 모습을 찾을 수 있어 심정적으로는 기독교에 끌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말합니다. 부활 후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다음에 도마를 만났을 때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도무지 믿지 못했습니다. 도마가 의심하며 예수님께 부활의 증거를 보여 달라 말하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 이었습니다. 즉 못자국과 창 자국이 부활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부활의 증거에는 죽었다고 하는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어령 교수님은 계속 말합니다. 부활의 종교라고 하는 기독교교회에 오늘날 고난의 상처가 있는가? 한국교회에서 고난의 상처가 있는 교회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를 다니며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은 바로 그런 교회를 보고 싶어 합니다. 또 그런 교인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그 삶의 자세를 따르는 교회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정치만 하고 높아지려 하고 대접받으려 하고 교회를 위해 희생을 안 한다면 여러분 그 목사를 좇아가시겠습니까? 제가 교인이라 한다면 그런 목사님 좇아가지 않겠습니다.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기독교인이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을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탄절이 무슨 날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날입니다. 예수를 찾는 날입니다. 마치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추수감사절을 지키듯이 예수를 잃어버리고 살았던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 잃었던 예수를 다시 찾는 날입니다. 교회는 자꾸만 영광을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덩달아 교인들도 면류관을 찾아 열심을 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삶의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양보하고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참고 나를 오히려 내어 주는 그 자세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에게 아들을 보내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의 마음을 다시 찾는 이 번 성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이 번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가 더 낮아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더 희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고
이곳에 평화가 깃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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