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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5일 주일] 예정입니까 운명입니까



예정입니까 운명입니까?

엡1:4-12


지난 한 주간 저는 목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감기는 아닌 것 같은데 목소리를 내려 하거나 찬양을 부르려 하면 기침이 자꾸 나와 말하기가 아주 많이 힘들었습니다. 힘들다고 하는 의미는 내 몸이 아프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우들의 집을 방문하여 예배드리는 심방 때 자꾸 기침이 나서 준비된 만큼 정성스런 예배가 되지 못해 너무 죄송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무엇보다 목 관리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자는 기침을 해 가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를 한 후에 제가 기침을 하는 모습이 안 돼 보였는지 어느 집사님께서 기침에 잘 듣는다며 우가이(가글) 약을 하나 주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우가이 하려보니 병이 좀 작게 느껴졌습니다. 이정도면 한 번 우가이하면 다 쓰겠다 생각하면서 입에 넣었는데 그 순간 저는 뭔가 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목이 뜨거워지고 화끈거렸던 것입니다.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후에서야 병에 있는 사용법을 읽어 보니 반 컵 정도의 물에 0..5ml의 약을 넣어 사용하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고생은 좀 했지만 그 덕에 확실하게 약을 써서 목 아픈 것은 어느 정도 다 나은 것 같습니다.

미련하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을 하면서 저는 오늘 설교와 저의 미련한 경험이 잘 연결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차이는 좀 있겠지만 우리 한국 사람은 매뉴얼 북을 찬찬히 잘 읽어보고 물건을 사용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부터도 매뉴얼 북은 항상 고장이 났을 때 보는 책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도 같은 방법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 교리에 대하여 영성에 대하여 잘 모르는 상황에서 편협한 지식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적으로 잘못되어 가는 부분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약을 잘 못 복용하여 목이 화끈거리고 뜨거워지는 것 같이 말입니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잘 숙지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잘못된 형태의 신앙을 갖게 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리의 내용 중 대표적인 것은 바로 <예정>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이 예정에 관한 것은 우리의 신앙에 매우 중요한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예정하셨다고 믿는 이 신앙은 우리가 이 땅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나 새 신자 교육을 받을 때 또 성경공부를 할 때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배우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교리를 <예정론>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것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 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사람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예정하신다는 말씀은 많이 나옵니다만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말씀으로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엡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에 있어서 무엇을 예정하셨는지 어떻게 예정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들은 바도 없습니다. 또 성경을 통해 체계적으로 배운 바도 없습니다. 여러분 예정론에 대하여 정확히 체계적으로 배워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마 많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고 고민이 있습니다. 이 예정론에 대하여 정확한 매뉴얼이 없다 보니 우리는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의 예정에 대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상식선의 예정은 무엇일까요? 그것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정에 대한 생각은 팔자(八字)나 운명(運命)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집니다. 우리는 의식 무의식 속에 도교(道敎)라고 하는 전통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정>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항상 <결정되어진 운명> 정도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랜 종교문화는 전통종교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교는 주역(周易)과 음양설(陰陽說)을 중심으로 운명과 재수를 예언하는 점성술로 발전하였고 또 한 편으로는 기(氣)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적(符籍)문화와 풍수지리로 발전하게 된 종교형태의 생활양식입니다.

그 중 주역(周易)과 음양설(陰陽說)에 의한 운명과 재수를 믿는 신앙은 일본인과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에게는 보편적인 신앙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신앙보다는 삶의 문화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수도 있을 만큼 우리는 생활 속에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히 도교를 믿지 않아도 일상생활 속의 문화와 같이 느끼고 있는 것이 이 운명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팔자(八字)에 의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운명이라는 것은 사람의 삶의 모든 과정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오늘의 일도 1년 뒤의 일도 10년 뒤의 일도 다 결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바꿀 수 있는 것이 못되고 만일 좋지 않은 운명을 갖고 태어나 그 운명을 바꾸기를 원한다면 부적을 소유한다든지 풍수의 영향으로 기(氣)를 바꾸는 등의 특별한 방법을 써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좋다 나쁘다 얘기하기 이전에 우리 기독교에서 예정론을 말하면서도 그 예정을 <운명>이나 <팔자>와 같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이 <팔자>와 기독교의 <예정>을 동일시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도 이런 예정에 관한 운명론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예정」이라는 단어의 이해 때문입니다. 예정이라는 단어는 <앞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미리 정해놓은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더 강하게 우리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의 예정이라는 단어가 나와도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몇 성경의 말씀들을 보면 우리의 일상생활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의 예정과 도교에서 말하는 운명이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나타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4장의 내용입니다.

행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고쳐준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큰 소동이 일었습니다. 베드로의 이적을 통하여 또 그의 설교를 통하여 5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대제사장 안나스는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다가 그 다음 날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명한 뒤 풀어주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핍박하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과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을 우리의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운명처럼 예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의 오늘의 일이나 내일의 일들 1년 뒤의 일들이 다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예정에 대하여 운명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운명을 바꿔 살아보려고 애를 써도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생각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그런 믿음은 위험한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삶의 행동에 매우 중대한 문제를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왜 공부를 해야 합니까?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실제로 저는 그런 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적잖이 봐 왔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고 아무리 공부를 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면 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생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생각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셨다면 전도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전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지 않았으면 예수를 믿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어느 시점에서 예수를 알게 하신다면 굳이 전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 아닙니까?


우리는 흔히 종교개혁을 했던 칼빈이 예정론을 말했다고 생각하지만 예정론은 그 훨씬 이전인 아우구스티누스로 올라가고 더 올라가서는 사도 바울까지 올라갑니다. 즉 칼빈이 처음으로 말 한 것은 아니며 칼빈은 예정론에 대하여 정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해하는 예정론은 바로 칼빈의 예정론에서 기인하는데 칼빈이 예정론을 정리할 때의 상황을 이해하면 칼빈의 예정론에 대하여 더욱 정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1. 기독교의 예정은 박해에 대한 위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칼빈이 살고 있던 1530년대의 프랑스는 개신교도의 박해가 매우 커졌던 때 였습니다. 많은 개신교의 지도자들이 화형을 당하게 되고 칼빈 자신도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자신을 숨겨 준 상인 드리포르쥬 라는 사람도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로 도망하게 되고 그곳에서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집 초판을 1535년에 출판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정리했던 기독교강요 초판에 보면 여섯 개의 장으로 구분하여 설명을 해 주는데 그 네 번째 장이 교회를 설명하는 <교회론>이고 이 교회론 안에서 <예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예정이라는 것은 박해 속에서 교회를 지키고 있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그리고 인내를 주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 그러기에 우리는 박해가 무서워 개종해서는 안 되며 끝까지 인내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몸이기에 예정을 입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것이고 영광이 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엡1:4-5 11-12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 받은 사람과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이 이미 하나님의 예정 속에 구분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고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의 계획으로 된 것이기에 그 구원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우리가 이 예배당에 나아와 앉아 있는 것 이것은 우리의 의지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과 예정 속에 이뤄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 예수를 믿는 것 예배당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시험과 환란이 와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여 구원해 주신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우리가 당하는 환란과 핍박도 하나님께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 또한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기독교의 예정은 우리 과거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주게 됩니다.


중세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후 한 가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방탕하게 생활했던 자신의 모습 죄 가운데 생활했던 자신의 모습들이 해석이 되질 않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거의 죄에 대한 아픔을 안고 살아갔습니다. 구원 이전의 삶의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저 낭비했었다 생각하고 무의미 했었다 여겼던 것입니다.
그 때에 교회는 그들에게 예정론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모든 인생의 과정은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이었다고. 그래서 죄를 지어 잘못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방탕한 생활로 무의미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예수를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과정이었음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내가 내 아내를 만난 것도 내 남편을 만난 것도 내가 일본에 와 사는 것도 내가 이 직업을 갖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예정은 현 시점에서 미래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라 현 시점에서 과거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껏 인도해 주신 분은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이뤄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대해 아쉬움을 갖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감을 갖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 있어서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인식되어집니까? 하나님의 예정으로 이미 결정이 난 것입니까? 팔자와 운명과도 같이 변할 수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의 미래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우리가 준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우리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딤후2:20-21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오래 전 부목사 생활을 할 때 저는 장학부를 맡아 일을 했었습니다. 그 교회는 1년 장학부 예산이 무척 많았는데 해마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유학생 등 전체 약 50명 정도를 선발하여 장학금을 지원하였습니다. 장학부를 맡아 일하면서 그냥 돈만 주는 것 보다는 1년에 한 번 씩 수련회를 하여 장학생이 된 것에 대한 자긍심도 높이고 서로 친교를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 싶어 수련회를 열었습니다. 그 첫 수련회 때 제가 특강을 하였는데 대학생인 한 친구가 「하나님이 예정을 다 해놓았다고 하는데 공부를 왜 해야 하며 교회에서는 왜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똑똑했던 그 친구는 목사가 어떻게 대답하는가를 보기 위해서 질문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때를 노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공부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기회의 폭을 넓히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좀 더 중요한 일을 우리에게 맡기고 싶어 하시는데 우리가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마음껏 우리를 쓰실 수 있도록 우리의 실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 중요한데 학생인 우리가 실력을 키우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하는 것이라 말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을 이뤄드리는 일이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준비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귀히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찾고 게십니다. 하나님이 다 결정해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팔자가 아닙니다. 운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을 깨끗하게 비우는 그 열심과 준비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후에 자신의 살아 온 삶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인 것입니다.

세상의 팔자와 운명에 속지 말고 또 그것을 탓하지 말고 힘을 내어 우리의 삶을 준비하며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최선을 다 해 열심히 살 수 있는
그 믿음과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운명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팔자가 우리의 생활을 얽매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열심히 준비하여
하나님의 쓰임 받는 자녀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열심히 산후에 이 모든 걸어 온 삶의 길이
하나님의 예정 속에 이뤄진 것임을 믿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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