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HOME SiteMap Contact Us Japanese Korean English Chinese
Information
   

[2005년 4월 10일 주일] 복음의 능력


복음의 능력

롬1:8-17





지난 3월 저는 관동지방회 교역자 수련회로 1박2일동안 草津에 다녀왔습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그 곳에서 동경으로 오는 길에 輕井澤을 들려 內村鑑三의 기념예배당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돌교회(石の敎會)」 이라고 부르는 그 예배당은 이름대로 돌로 지은 아주 멋진 예배당이었고 그 안에는 內村鑑三의 유품들과 사진 그의 일대기의 소개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를 안내하던 분에게 이곳은 주일에 예배가 몇 번 있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저를 이상하게 보면서 여기는 예배드리는 곳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뭘 하는 곳이냐고 되물었더니 여기는 결혼식을 주로 하는 교회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토록 훌륭한 內村鑑三의 기념예배당이 결혼식장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인에게 있어서의 內村鑑三 그는 일본의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었고 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 아니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의 기독교계에서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를 소개할 때에는 늘 기독교사상가라고 소개할 뿐입니다.

그 천하의 內村鑑三을 말할 때 기독교사상가라고 소개하는 것과 또 그의 기념 예배당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 예식장이 된 것 모두 제 마음을 참으로 무겁게 만드는 사실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독교사상가로 부르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지나친 국수주의를 주장했다는데서 기인합니다. 그는 1903년 <성서와 연구>라는 잡지에 내게는 두 J가 있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는 Jesus이고 또 하나는 Japan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기념 예배당에는 內村鑑三이 그 고백을 쓴 친필 붓글씨가 큼직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본 사람이 일본을 사랑하는 것이 뭐 그리 나쁘겠습니까 만은 그 국수주의가 지나쳐 대동아공영권에 있는 아시아 각 나라의 교회들에게 태평양 전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 때 그는 롬2:17-22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미국을 싸워야 하는 대상으로 결정짓고 태평양 전쟁을 성스러운 전쟁으로 말하였던 것입니다.

롬2:17-22
2: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2: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미국의 불의에 대해서 우리는 무기를 든다. 이 얼마나 성스러운 전쟁인가?」

우리는 內村鑑三이 관동지방에서 일으켰던 성서연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고 일본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공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본교회에서는 그보다 三浦綾子를 더욱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는가?
왜 기념 예배당이 결혼식장이 되었고
그는 왜 모든 아시아에 있는 교회가 태평양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편지를 썼을까? 그가 만든 성서연구회는 왜 오늘까지도 이어지지 않을까?


內村鑑三이 성서를 연구하고 많은 학생들을 길러내 일본의 유명한 석학들로 키울 때 바로 그 때 동경의 한 변두리에서 조선에서 온 유학생들에 의해 조그마한 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로 동경교회입니다. 內村鑑三의 성서연구회보다 훨씬 더 유명하지도 못하고 깊이 있게 성경을 공부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內村鑑三의 교회는 결혼식장이 되어 있고 우리의 교회는 아직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교회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입니다. 복음이 어떻게 이해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內村鑑三의 제자들이 성서를 배울 때 그들은 복음을 머리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복음은 가슴으로도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상도 좋고 학문적 연구도 필요합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바른 신앙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에 성서의 연구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공부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연구를 통해 밝혀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복음의 이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은 성경 곳곳에서 수없이 많이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의 말씀도 그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하는 중에 아덴(아테네)에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마게도니아(유럽 땅)의 모든 도시에서의 전도가 무척 힘들고 어려웠지만 아덴을 들어갈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 아덴에서만큼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철학과 사상과 논쟁을 좋아했던 아덴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논쟁에는 자기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정말 열심히 그들과 논쟁을 하며 예수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철저한 실패였습니다.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은 아덴의 사람들은 다 듣고 난 후에 오히려 바울을 희롱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그냥 하나의 또 다른 신을 말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설교했을 때 옷을 찢고 회개했던 청중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는 논리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히려 겁을 먹고 들어갔던 환락의 도시 고린도에서는 성공적으로 복음이 증거 되었고 그래서 고린도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세상적으로 힘들었던 고린도에서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에서는 바울이 스스로 자신 있어 하던 논쟁도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도>만을 전했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전했을 뿐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논리가 아닙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논리로 증명되지 않듯이 십자가의 사건도 논리로 증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 오실 때 설교를 들을 때 무엇을 듣기 위해 나오십니까? 세상의 지식입니까? 재미있는 얘기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이 자리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이 듣고 싶은 것입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 좋은 설교학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교수님은 우리를 아주 엄하게 교육시키셨는데 설교자의 자세와 설교의 원리에 대해 잊지 못할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교인이 왜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간혹 나이가 젊은 목회자들은 나이 많은 교인들이 자신을 무식하다고 무시할까봐 세상적 지식을 말하고 싶어 하는 유혹을 가집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이론을 얘기하거나 깊은 신학적 학문적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교인들은 성경을 듣고 싶어 예배당에 오기 때문에 성경을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 학문적 얘기를 하면 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목사님 그런 얘기는 우리가 더 잘 압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그런 얘기 하지 마시고 성경을 말 해 주세요.」

설교자의 또 하나의 유혹은 성경을 얘기해도 꼭 신학적으로 어려운 얘기를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래야 교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그 말씀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말씀과 나와의 관계를 설명해 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나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듣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좌우에 날 선 검처럼 우리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세상적 지식을 뛰어 넘습니다. 세상적 경험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막 신학교를 졸업한 젊은 전도사님의 설교에도 6070이 된 노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고 신학교밖에 졸업을 못한 목회자의 설교에 대학 교수님들이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죄 사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말씀에는 십자가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비로소 성경의 모든 진리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예수를 믿고 있는 교인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증거합니다. 로마 교회는 예수를 잘 믿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년이라는 교회의 전통도 있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지에 있었던 작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또 다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왜입니까? 복음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필요하지만 예수를 아는 교인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랜 신앙생활 속에 예수님과 의 첫 만남의 감격과 감동이 사라진 사람들은 복음이 필요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예배 자체가 감격스럽고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하루하루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인해 감사의 삶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또 다시 복음이 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되는 복음이 아닌 가슴으로 믿어지는 그런 복음이 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 복음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죄 사함과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이 있으십니까? 구원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으십니까? 죄인 중에 괴수라는 바울의 고백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께서 사신다는 그 고백이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고 있습니까?
그것이 사라졌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도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이 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못된 습성의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아름답게 바꿔주는 힘입니다. 복음에는 우리의 소망을 이루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에 어느 노인 한 분을 소개해 드립니다. 이 분은 예수를 믿고 난 후 그 기쁨에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간증을 했던 분입니다. 책을 통해 우연히 이 간증을 접하게 되었는데 간단한 내용의 간증임에도 제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기에 여러분들에게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의 시점에서 간증했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소개하며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올 해 67세 되는 아무게라고 합니다.
소년기는 일본에서 살아 일본식 교육과 일본 문화 속에서 감수성 많은 10대의 성격이 형성되었습니다. 정직 결백 집단에 대한 충성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시키라는 등... 그러나 종교에 대해서는 저 개인 성격 탓인지 신이란 것은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해방 후 조국의 육군 장교가 되어 부대를 지휘할 때에는 자기희생 위에 부대를 세운다는 것을 저 자신과 부하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3년의 한국전쟁과 1년여의 월남전 참전 경험은 사선을 넘나드는 가운데 저 자신을 냉철하고 잔혹한 하나의 냉혈한으로 만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 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30년의 군대 생활을 나치고 비슷한 직종에 10여 년 간 근무하면서도 그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3년 전 보기에는 순조롭고 평화롭던 저희 가정에 큰 재난이 닥쳐왔습니다. 아내가 병으로 쓰러지고 자식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저는 방바닥을 치면서 아무런 죄지음 없이 성실하게 지금껏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나에게 하늘은 이렇게도 심한 재난을 왜 주는가? 세상에 신이 어디 있는가? 만일 있다면 이 현실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1993년 9월 어느 날 미국 유학 중에 이미 주님을 영접한 큰 이들이 30년간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자기 어미를 나 몰래 개종시키고 저에게도 교회 나갈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물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지요. 눈물로 호소하는 큰아들 청에 못 이겨 1993년 9월 19일 교회를 처음 나오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 중 알 수 없는 무엇이 저의 마음속에 와 닿는 듯하였고 같은 해 11월 21일 설교를 들으면서 60평생에 걸친 제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그 위대한 사랑 앞에 굴복하고 보니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그 고난이란 것이 실은 나를 바로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어 감사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세상 물정을 보는 시각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눈물도 흘릴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부하동료의 죽음도 국가를 위해 잘 죽었다는 식의 애도였습니다. 주월사령관이 국립묘지 파월장병 전사자 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신문기사를 읽고서도 위선적인 쇼라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눈물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참되고 위대하신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흐르는 눈물은 근간 주님을 영접한 지 2년도 채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60년 동안 흘린 눈물의 몇 십 배가 되는 듯싶습니다. 저의 죄를 위하여 피 흘리신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고 앉아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저를 가리켜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저 자신은 제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한 것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기의 자신만만하던 오기는 이미 오간데 없어졌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거울삼아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참된 주님의 사람이 되기를 노력할 따름입니다.
지난 3월 24일 눈병으로 인해 구역예배에 참석치 못했을 때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사지는 멀쩡하건만 눈이 거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사랑하는 아내와 전 식구가 더불어 오로지 주님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 노인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의 한 구절을 말씀드리면서 저의 간증을 끝맺겠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아멘.




  
[ Total : 248 ] [ 7 / 9 ]
No. Subject File Date Hits
68  [2005년 7월 3일 주일] 재미있는 세상 재미없는 교회 05-07-031461
67  [2005년 6월 19일 주일] 예배가 기다려지는 자 05-06-191177
66  [2005년 6월 12일 주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리라 05-06-121320
65  [2005년 6월 5일 주일] 예정입니까 운명입니까 05-06-051266
64  [2005년 5월 29일 주일] 신앙과 생활의 관계 05-05-291308
63  [2005월 5월 22일 주일] 제일 좋은 은사를 사모하며 05-05-221313
62  [2005년 5월 1일 주일] 누구의 소유입니까? 05-05-011418
61  [2005년 4월 17일 주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05-04-171349
60  [2005년 4월 10일 주일] 복음의 능력  05-04-101251
59  [2005년 4월 3일 주일] 아멘 아멘 할찌니라 05-04-031643
58  [2005년 3월 27일 주일] 우리 교회의 부활 05-04-011328
57  [2005년 3월 6일 주일] 나를 사랑하는 오직 한 분 05-03-081276
56  [2005년 2월 20일 주일] 믿음으로 뿌리는 씨 05-03-051440
55  [2005년 2월 13일 주일] 좋은 교회 좋은 목사 05-02-151324
54  [2005년 2월 6일 주일] 기다리는 사람 서두르는 사람 05-02-081292
53  [2005년 1월 30일 주일] 하나님의 참된 백성 05-02-031175
52  [2005년 1월 9일 주일] 주께 엎드리는 자 05-01-091265
51  [2005년 1월 2일 주일] 또 한해를 사는 이유 05-01-021407
50  [2005년 1월 1일 신년예배] 마광한 살 이방의 빛 05-01-011434
49  [2004년 12월 19일 주일] 마구간 과 말구유 04-12-191259
48  [2004년 12월 12일 주일] 신앙생활의 유혹들 04-12-121271
47  [2004년 12월 5일 주일] 바른 기도생활 04-12-061527
46  [2004년 11월 21일 주일] 무엇으로 보답할꼬 04-11-221305
45  [2004년 11월 14일 주일] 십일조와 주일성수 04-11-141324
44  [2004년 11월 7일 주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04-11-071315
43  [2004년 10월 31일 주일] 예수님은 누구신가 04-10-311191
42  [2004년 10월 17일 주일] 그리스도인의 출발점 04-10-171459
41  [2004년 10월 10일 주일] 아들의 이름 임마누엘 04-10-101087
40  [2004년 10월 3일 주일] 창조의 하나님 04-10-031404
39  [2004년 9월 19일 주일] 난파선의 중심 끈 04-09-191273
[1][2][3][4][5][6][7][8][9]

  
  

 

 

    ▲TOP  


〒162-0827 東京都新宿区若宮町24 東京教会
24 Wakamiya-cho, Shinjuku-ku, Tokyo, 162-0827, Japan
Tel: 03-3260-8891 Fax: 03-3268-6130    
(C) The Tokyo Korean Christian Church in Japan Ministrie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