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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31일 주일]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요4:5-14



오늘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알아보는 시간 중에 예수님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30분 정도의 짧은 설교 시간에 모든 것을 다 말씀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한 청년이 전쟁에 나갔다가 두 눈을 잃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앞을 못보고 살아가는 이 청년은 늘 자신의 처지와 삶에 대해 절망가운데 있고 또 자심의 삶이 너무 비참해지는 것 같아 몇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그에게 한 쪽 안구를 기증한 사람이 있으니 수술을 받자고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청년은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한 쪽 눈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사코 수술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괴로워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불행해 집니다. 그러나 불행한 상황 그 자체보다는 불행에 처해있는 자신에 대하여 더욱 비참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좌절과 아픔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저는 심리학을 좋아합니다. 제 방에 가면 책장에 책이 있는데 가만 세어 보니 반 정도가 심리학에 관한 책인 것 같습니다. 자연 기독교심리를 공부하게 되었고 더 깊게는 상담과 심리학에 기초를 둔 기독교 가정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에 보면 많은 심리학자가 나오지만 제가 참 좋아하는 심리학자는 융(Gustav Carl Jung)입니다. 인간의 성격과 심리를 비교적 정확하게 정리해 놓은 첫 심리학자라 여겨집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알게 모르게 다섯 가지의 감옥에 갇혀 산다고 말하는데 그의 논리가 매우 날카로운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 사랑의 감옥>입니다. 이것은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남들은 다 나를 위한 도구이고 나를 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중심에 자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주위로부터 배척을 받게 됩니다. 나만을 챙기다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감옥은 <근심의 감옥>입니다. 쓸데없는 일에 걱정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잡니다. 몸도 마음도 상하고 맙니다. 현재의 일 장래의 일이 모두 다 고민거리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제껏 살아 오셔서 다 아시겠지만 우리가 당하는 문제들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문제도 있고 또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문제는 그냥 놔두면 해결 되는데 그것까지 붙들고 씨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걱정합니다.

세 번째의 감옥은 <과거의 감옥>입니다. 과거의 지난 일에 대한 후회 「젊었을 때 그러지 말 것을」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것을」 「이 직업을 택하는 것이 아닌데...」 지난날에 매여서 현재와 미래를 그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의 영광 속에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내가 왕년에는...」 「내가 이래 뵈도 옛날에는...」 라고 생각하면서 과거 속에 묻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늘 과거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의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남의 것만 좋게 보는 부러움을 말합니다. 나의 아내는 못났고 남의 아내는 예뻐 보입니다. 나의 남편은 무능하고 남의 남편은 유능해 보입니다. 어떤 처지든 내가 처한 환경이 좋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행복한 것인데 자족할 줄 모르고 남의 처지와 형편만 부러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서운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증오의 감옥>입니다. 일본에는 황혼이혼(黃昏離婚) 나리타 이혼(成田離婚)이란 말이 있습니다. 남편의 퇴직 때까지 기다렸다가 퇴직금을 받으면 이혼하는 것이 황혼이혼이고 아이들이 결혼할 때 까지 참고 기다렸다가 신혼여행을 떠나면 나리타 공항에서 이혼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미 심리학에서 쓰이는 용어입니다. 꾹 참고 기다렸다가 이혼하는 것 이해는 갑니다만 그동안의 증오의 감옥은 누가 보상해 줄 수 있습니까?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일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얽어매는 무서운 감옥인지 아십니까?



융은 말합니다.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지수는 얼마나 자기를 감옥으로부터 꺼내느냐에 달려 있다 말합니다. 상담이 무엇입니까? 상담은 상담자가 내담자를 치유해 주는 것입니다. 융의 이론으로 상담을 한다면 상담자가 내담자를 대할 때 그가 무슨 감옥에 갇혀 있는지를 빨리 알아내고는 그를 그 감옥에서 풀어주는 것을 좋은 상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내적 치유>라고도 말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인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도 불행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이런 정신적인 감옥에 갇혀본 적이 있으십니까? 많은 괴로움이 있습니다. 더 불행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갖고 있는 것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러나 많이 갖고 있어도 더 갖지 못해 안절부절 하는 <선망의 감옥>에 자신을 가둬놓고 있다면 그는 절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한 불행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처지가 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많은 감옥에 자신을 가둬 놓고 있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으로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생각하며 유대인에 대하여 심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를 멸시하고 상종치 않는다 생각하여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의 행복을 추구해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남자에게서 찾았던 것 같습니다. 결혼을 적어도 다섯 번을 하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별도 있겠고 배반도 있겠고 자기가 떠났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남자에게서 행복을 찾으려는 종속적인 행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끄러움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신분과 처지가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 사람을 싫어하게 되고 사람을 피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어 일부러 한낮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과 저녁에만 물을 길러 다닙니다. 그 여인은 사람을 피한 것입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꿨다는 둥 지금은 누구와 산다는 둥 자신을 행해 손가락질 하며 말하는 남들을 피해 사람이 없는 시간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여인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융의 심리학적 이론으로 보면 그는 <자기 사랑의 감옥> <근심의 감옥> <증오의 감옥>이 복합적으로 있는 불행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환경에 의해 성격도 변하는 존재입니다. 오랜 시간을 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도 성격이 변합니다. 툭 건드려도 싸움을 하려 합니다. 싸움이 익숙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물 좀 달라 하니 달라는 물은 안주고 싸움을 걸어옵니다.

9절)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11절)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한 마디 말을 예사로 넘기지 않습니다. 우물의 물이 자기 것도 아닌데 그 물 한 그릇 선뜻 내 주지 못할 만큼 마음이 닫혀 있는 성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서너 시간 토론 한 것도 아니요 병을 고쳐 준 것도 아니고 여러 해 동안 따라다니며 공부한 것도 아닌데 그저 예수님과 한 번 만나 대화한 것뿐인데 그 예수님을 한 번 만남으로 사람이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4:28-29 /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여러분 사랑의 확증과 사죄의 기쁨은 존재의 가치를 높여줍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갔다 했습니다. 물동이는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이고 동네는 그녀가 피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녀가 예수님을 만난 후로 물동이는 버렸다고 했고 그가 달려간 곳은 동네였다 했습니다. 그녀가 치유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녀는 자기를 얽어매던 그 감옥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다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만난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신 예수님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감옥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감옥뿐 아니라 죽음의 문제까지 모두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를 만난다면 우리도 그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관계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한 것입니다.

참 예배는 감옥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다 다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나온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안 나오면 안 될 것 같아 억지로 나온 분도 있을 것이고 예수에 대해 지식으로 알고 싶어 나온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서 나를 얽매고 있는 모든 것에서 자유 함을 누리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배가 예배다워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절대공간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허전하십니까? 허무하십니까? 답답하십니까? 혹 사람이 싫지는 않으십니까? 남편의 사랑 아내의 사랑 자녀의 사랑 혹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것은 돈으로도 채울 수 없고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이 갈증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의 청년 얘기로 돌아갑니다.

그 청년은 결국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고는 회복이 되어 감고 있었던 붕대를 조심스레 풉니다. 하나하나 붕대를 풀어 가는데 풍대의 겹이 얇아질수록 희미하게 사물의 형체가 보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초점이 맞춰지고 들여다보니 그렇게도 사랑하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한 쪽 눈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빛을 선사해 준 것입니다.

전에는 자신의 삶에 많은 불평이 있었습니다. 「장님으로 살아 뭐하냐!」 「병신으로 살아 뭐하냐!」 그래서 아픔만을 안고 살아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내 눈은 하나밖에 없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으니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서 그 아픔은 치유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롬5: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우리의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지도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10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길 그 사랑을 내가 받고 있음을 느끼는 것 십자가의 사랑을 똑바로 아는 길 십자가 안에서 주님과 나와의 만남의 관계가 바로 이루어질 때 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얽어매고 있는 수많은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 말합니다.

요8:33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설교 후 기도>

세상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우리의 삶의 갈증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아지려는 것으로 우리의 모든 아픔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우리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아픔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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